▲도서출판 리좀
바야흐로 완연한 봄이다. 봄은 꽃의 계절이자 여행의 계절이다. 남도로부터 들려오는 꽃소식에 주말이면 길 위는 상춘(常春)을 즐기려는 인파들로 넘쳐난다. 주 5일 근무제의 시행으로 더욱 늘어난 여가를 즐기기에 여행만한 것도 없으니 어디론가 떠나고픈 유혹을 견뎌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행길에 오르고 한 번에 몰린 여행객들로 인해 유명관광지는 몸살을 앓는다. 그러니 사람도 고생이고 그 고장도 피로하다. 여행이 번잡한 일상의 복사판이라면 그 여행의 의미는 반감될 것이 분명하다.
쫓기듯 살아가는 일상에서 느끼는 짜증과 고단을 고스란히 싣고 가는 여행에서 대체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단순히 목적지의 경승을 보고 현장존재증명 같은 사진찍기에 열중하다보면 돌아오는 차안에는 피곤만이 실려 있다.
사는 곳으로부터 벗어났다는 해방감은 일시적인 흥분에 지나지 않는다. 제대로 느끼고 자신 안에서 무엇인가 찾아 돌아올 여행에서 '여유'는 여행의 필수품 같은 것이다. 짊어진 배낭에 넣어가야 할 것은 주전부리가 아니라 시간적 여유와 (목적지에 대한) 공간적 이해가 우선 되어야 한다.
흔히 말하듯 '무작정 떠나'는 여행은 사실 가장 많은 것을 얻고 돌아와야 할 여행임을 드러내는 역설적 수사다. 복잡과 부대낌으로 정의되는 오늘의 일상에서, 벗어나고픈 현대인의 강렬한 욕구가 곧 일탈에의 욕망이고 이것의 속된 표현이 '무작정 떠나보자'이다.
모 광고카피처럼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충동질은 떠난 뒤에 무엇이 있다는 것인데, 기자의 눈에 비친 여행객들의 대부분은 그 무엇보다는 가지 않아도 보고 듣고 알 수 있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그저 활짝 핀 꽃을 보고 잠깐 환희하면 그만이다. 물론 그 본다는 행위와 (향기를) 맡는 행위 뒤에는 일상에서 경험하지 못하는 감정의 발로와 심정적인 카타르시스(정화)를 체험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는 좀 서운하지 않을까? 기왕 떠난 여행길, 자신과 가족과 주변에 대한 새로운 인식, 관계의 설정 등 일상에서 놓치고 산 것들에 대한 사유와 모색의 기회로 삼을 수만 있다면 더욱 알찬 여행이 되지 않을까.
때문에 기자는 여행을 떠나는 여행객들에게 여행의 패턴을 다양화 해볼 것을 권한다. 자가용이나 관광버스를 이용하여 몰려다니는 여행, 가족 아니면 친분 있는 사람들과 무리지어 떠나는 여행. 이런 천편일률적인 여행의 틀에서 탈피하여 가끔씩은 혼자 떠나는 여행, 인적이 드문 곳으로의 여행,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 나누어 떠나는 여행, 대중교통을 이용한 여행 등 다양한 여행의 방식을 고루고루 경험해보기를 권한다.
여행을 지독히 좋아하는 기자의 경우, 자주 여행을 다닌다. 그때마다 다른 여행의 방식을 통해 매번 다른 감상과 느낌과 인상을 가지고 돌아온다. 책을 읽는 것만큼이나 여행은 내게 있어 삶을 살도록, 갑갑한 세상살이를 견디도록 해주는 종교 같은 것이다.
(가정을 꾸린 탓으로)가족단위 여행을 자주 하는 편이지만 가끔은 혼자 여행을 다닌다. 때론 아내만의 여행을 보내기도 한다. 떠난 사람은 홀가분해서 좋고 남은 사람은 그리움을 추억할 수 있어 좋다. 부부가 반드시 같은 여행지를 기억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아내는 발리를 알지만 나는 모른다. 떠날 때는 시큰둥하다가 돌아오는 시각에 맞춰 공항에 마중 나갔던 날, 우리는 집으로 오지 못하고 강화도에서 하루를 보냈다. 이런 식이다. 아이들과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을 떼어두고 둘만이 다니는 여행은 젊은 날의 연애시절을 우리에게 돌려준다.
일부러 고물버스를 타고 터벅터벅 걷는 재미에 가난했던 젊은 날은 아름답기만 하다. 늙어 보이는 남자와 젊어 보이는 여자의 동행을 보고 수군수군 불륜을 의심하는 눈길에 아랑곳하지 않다가도 그 세태에는 쓴웃음을 짓는다. 그런 식이다.
가정이나 사회나 함께 사는 이들의 사이가 불편한 것은 '개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세상이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고 모든 사람이 한 쪽으로만 모여들면 살기 쉬울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여행이란 개인을 찾는 고귀한 경험
월드컵의 해를 맞아 다시 붉은 광장이 웅성대고 술렁이면 다 좋을 것 같지만 거기에 끼지 못하는 사람은 언제고 있는 법이다. 모순의 극복이란 틀리다고 우기는 것이 아니라 다르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사고의 균형 인식의 형평이다.
'개인'이란 '이기'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개인을 인정해보라. 가족 간의 불화는 거의가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기대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면, 아내는 살림살이에 대해 남편의 더 많은 기여를 기대한다. 남편은 육아며 살림은 아내의 몫이라며 바깥일의 고단함을 항변한다.
그 기대와 의지의 괴리에서 다툼은 시작되는 것이다. 아내에게 아내만의 개인성이 있음을 존중할 때 가부장은 사라진다. 아내의 입장에서는 의지함으로 생기는 일상의 우울은 찾아볼 수 없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개인에 대한 존중이 바탕이 된 후에야 진정한 사회의 통합이 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 획일적이고 기계적으로 이미 짜여진 폼에 맞춘 세상살이를 하고 그 폼에 맞지 않으면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또한 폼에 맞지 않는 대상에 대하여 심한 비난과 성토를 해댄다.
바둑판이 이미 형식이 갖추어진 평면이라 해서 그 위에 놓이는 바둑돌이 형식을 완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변화무쌍한 관계의 망을 형성하기에 형식을 넘어선 자유를 완성해내는 것이다.
여행이란 바로 이런 개인을 찾는 아주 고귀한 경험이다. 혼자이든 함께이든 여행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개인을 찾아가는 여정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이다.
그 개인으로의 여행길에서 만나는 사람들, 이를테면 함께 떠난 가족이며 동료들은 이제 단순히 물리적 대상이 아니라 그 상대방의 개인성을 내가 배려하고 존중해야할 중요한 대상으로 다가온다. 자연스런 관계의 모색이 그들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내가 있는 위치에서 그들과 맺어야할 적당한 거리와 흡인과 자장의 세기를 조정하게 되는 것이다.
소설가이자 르포작가이기도 한 박원식이 간이역을 여행하면서 느낀 인상을 적고 한적한 간이역 주변의 일상과 사람들을 사진작가 신준식이 사진으로 박아 놓은 책, <낯선 정거장에서 기다리네>는 바로 이런 개인으로의 여행, 진정한 의미에서 그 고장의 삶과 문화를 이해하는 여행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비, 증기 그리고 속도-위대한 서부철도>, 터너 J.M.W Turner, 유화, 1844, 내셔널 갤러리, 런던.돌베게
궁벽한 촌사람들을 대처의 장터로 실어 나르던 완행열차마저 끊긴 사람 드문 간이역으로의 여행을 통해 저자는 우리에게 '느림'의 여유와 '기다림'의 철학을 되새긴다. 레일 위로는 지금도 현대의 바쁜 시간과 열차시간표처럼 꽉 짜여진 일상이 매일 지나쳐 간다. 그 속도를 따라 잡기란 불가능하다.
우리가 그 속도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우리의 시간은 늘 기차화통처럼 헉헉댈 뿐이다. 간이역에 서면 그 불가능한 욕심에 우리가 어떻게 피폐해가고 있는지 알 수가 있다.
현대의 속도와 우리네 삶의 풍요는 양 편으로 갈라진 채 만날 수 없는 레일의 운명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택은 자명하다. 우리의 속도로 돌아와야 한다. 그것이 바로 기차여행에서 우리가 느끼고 찾아야할 것이리라.
"시골 간이역에 서면 굼벵이들이 탐닉할 갖가지 성찬이 차려져 있다. 태연한 퇴락, 무참한 적막, 태평한 방심, 쓸쓸한 독거, 은은한 서정, 바로 이런 것들이 간이역의 식탁을 이룬다."고 저자는 말한다.
여행을 자주하면서도 여행기를 쓰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나 역시 굼벵이의 식탁을 좋아하는 까닭에 그것을 싫어할 것 같은 독자들의 입맛이 겁나기 때문이다. 이 책을 빌어 여러분도 굼벵이의 식탁에 앉아 여러분에게만 차려진 '개인'의 성찬을 즐겨보시길 권한다.
| | 책 속의 간이역들 | | | | *동해남부선 양자동역-시간조차 쉬어가는 간이역이 그리울 때 *영동선 춘양역-뗏목에 실려 간 세월의 잔해를 바라볼 때 *영동선 통리역-진흙처럼 둔한 권태가 차오를 때 *경부선 추풍령역-갈 길 찾아서 온 길 돌아볼 때 *장항선 웅천역-오감이 열리는 해변의 고독에 잠길 때 *중앙선 탑리역-영혼으로 안길 풍경의 매혹을 찾을 때 *영동선 승부역-마음속 오지의 자유를 노래할 때 *중앙선 희방사역-산사의 깊은 정적에 젖어들 때 *중앙선 용문역-쓸쓸한 삶의 괘종이 댕댕 울릴 때 *충북선 삼탄역-강물이 전하는 소식에 귀 기울일 때 *태백선 고한역-겨울 산사에서 남모를 업을 고할 때 *중앙선 운산역-흐린 지상에서 새처럼 날아오를 때 *장항선 주포역-포구에 앉아 저문 날의 회상에 잠길 때 *장항선 신례원역-그윽한 유적지에 마음 등짐 내릴 때 *경북선 용궁역-시간의 범속함을 명상할 때 *경부선 직지사역-번뇌 스러지는 시골길 걸을 때 *경전선 이양역-일상의 감옥을 탈출한 하루여행이 목마를 때 *전라선 압록역-마음 흔들려 강물처럼 흐를 때 *호남선 개태사역-오지 않는 기차를 닮은 삶의 여정 돌아볼 때 | | | | |
덧붙이는 글 | * 낯선 정거장에서 기다리네/박원식 글/신준식 사진/리좀 간/9000원
낯선 정거장에서 기다리네
박원식 지음, 신준식 사진,
리좀,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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