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약 껍데기, 단추, 수건, 나무도마에서 나온 시(詩)

[서평] 문숙 시인의 첫 시집 <단추>

등록 2006.04.14 13:52수정 2006.04.14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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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문숙 첫 시집 <단추>

문숙 첫 시집 <단추> ⓒ 천년의시작

문숙 시인의 첫 시집 <단추>가 도서출판 천년의시작에서 나왔다. 1961년 경남 하동 출신인 문숙 시인은 2000년 <자유문학>으로 등단했으며, 2005년 '서울문화재단'으로부터 신진작가 지원금을 받았다. 그는 2006년 현재 (사)현대불교문인협회에서 펴내고 있는 <불교문예>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문숙 시인이 불교 신자이고 또 현재 (사)현대불교문인협회에서 펴내고 있는 <불교문예>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정작 그의 첫 시집 <단추>에는 불교적 상상력에 바탕을 둔 선(禪)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시는 그리 많지 않다. 시집 <단추>에는 우리 시대의 여성적 삶에서, 또 가정주부의 일상적 삶을 제재로 한 시편들이 많다.


부엌 천정에 매달린 형광등
스위치를 당겨도 쉽게 스파크가 일어나지 않는다
빛이 다 빠져나가고 껍데기만 남아 깜박거린다
하얗던 몸속으로 검은 시간이 스민다

양 모서리가 캄캄해져 온다
긴 시간 나를 굽어보며
내 모퉁이를 환하게 비추던 한 생애가
속절없이 저물고 있다
- '어머니' 전문.


어두운 한 공간을 불 밝히려 애를 쓰다가 "빛이 다 빠져나가고 껍데기만 남아 깜박거리"는 부엌에 매달린 형광등을 보면서 한 가족의 삶을 불 밝히기 위해 헌신적으로 자신의 몸을 희생해온 우리들 어머니의 삶을 온전히 복원해내고 있다. 나를 비추던 한 생애의 무너짐, 그 속절없이 스며드는 검은 시간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시적 화자의 젖은 눈빛이 쓸쓸한 감동을 자아내고 있다. 장황한 요설이나 높은 목소리를 배제하고 차분하게 그려내고 있는 그의 짧은 시가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이러한 문숙 시인의 시를 두고 이은봉 문학평론가는 "문숙 시는 나날의 생활과 경험 속에서 구체적으로 불거져 나온다. 일상의 존재들에 내재해 있는 진실이나 의미를 순간적 직관을 통해 포착해내는 것이 그의 시의 방법적 특징이다"라고 평하고 있다.

문숙 시인의 시는 일상적 삶에서 맞닥뜨리는 생활 제재에서 구축되고 있다. 늙은 고무장갑, 치약 껍데기, 항아리, 단추, 버려진 종이컵, 새우튀김, 버선코, 소화기, 누수, 수건, 페트병, 가로수, 컴퓨터, 우산, 마늘, 낡은 장롱, 금 간 화분, 나무도마 등이 문숙 시인이 시의 제재로 가져온 사물들이며, 그것은 그대로 시의 제목으로 차용되고 있다. 문숙 시인은 이러한 시적 대상에 대한 깊은 관찰과 사색을 통해 그것을 우리들의 삶의 문제로 재구(再構)해 낸다. 그래서 그의 시는 난해하지도 않고 병들어 있지 않다. 건강하고 힘차다.


딸아이를 향해 목소리를 높인다
책상보다 거울 앞에 자주 서는 사춘기 딸
되돌아오는 메아리에 놀라며
아이 대신 축축해져서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수건을 본다

내 몸에 묻은 물기를 거두며
지금은 숭숭 구멍 난 수건이 있다
부드러운 촉수를 촘촘히 세우고
가까이에서 나를 감싸며
한평생 젖어 살던 어머니


습기 어린 눈으로 목욕탕 거울 속에서
대를 잇는
또 하나의 젖은 수건을 본다
- <수건>전문.


인용한 시는 내던져진 수건 한 장을 통해 '어머니-나-딸아이'로 이어지는 우리 시대의 "숭숭 구멍 난 수건"과도 같은 힘겨운 여성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일상 가까이에 있는 사물들에 대한 체험과 깊은 관찰을 제재로 하여 강요와 억지가 아닌, 간명하면서도 쉬운 내용으로 긴 여운과 감동을 주는 것이 바로 문숙의 시세계다.

나는 문숙 시인의 첫 시집 <단추>를 읽으면서 오래 전 내게 적지 않은 감동으로 다가온 양정자의 시집 <아내 일기>를 떠올렸다. 남편 뒷바라지, 자식 키우기, 설거지 구정물 등의 일상적이고 힘겨운 여성적 삶에서 삶의 진리를 시화(詩化)한 문학의 진정성을 문숙의 시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끝으로 문숙 시인에게 바라는 바가 있다면 이러한 일상적 삶의 체험을 불교적 상상력으로 시 공간을 채울 수 없을까 하는 점이다. 시집 <단추>에서 '까치의 생각', '겨울 칠장사' 등이 불교적 상상력으로 얻어진 시편 같은데, 일상적 삶의 체험이 녹아들어가 있지 않고, 너무 간명하여 큰 공감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의 다음 시집이 기다려진다.

단추

문숙 지음,
천년의시작,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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