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청스런 사투리...'유진'의 재발견

MBC 주말극 <진짜 진짜 좋아해>의 연기자 '유진'을 보고

등록 2006.04.17 15:34수정 2006.04.17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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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케이블이며 위성접시 하나 없다 보니 TV 채널이라야 달랑 5개가 전부다. 이승엽의 홈런 장면을 볼 수도 없고 박지성의 맨유도 뉴스에서 만나는 게 전부다. 현대방송문화의 사각지대에서 고립을 자초하며 사는 이유를 굳이 밝힐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상파 드라마 역시 거의 보지 않는다. 기자의 TV 보기는 그래서 늘 토막 난 스토리와 영상으로 존재한다.

서두에 쓸데없는 장황설을 늘어놓는 이유는 단 2회 방송분을 본 주제에 한 인물의 연기를 평한다는 비난을 모면하기 위해서다. 주말에 우연히 MBC의 주말극 <진짜 진짜 좋아해>를 보았다. 가수로 알고 있던 SES의 유진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기자는 지레 불쾌하였다.

요즘 들어 방송 캐스팅의 공식처럼 굳어버린 인기가수들의 드라마 출연에 대한 기자의 선입견 탓이었다. 자질과 실력보다는 인기 위주의 캐스팅에 대한 부정적 인상은 비단 기자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1990년대 들어 연기자 육성을 포기한 방송사들과 한 인물자원을 가지고 여러 곳에서 써먹으며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연예기획사들의 소위 원 소스(One Source)-멀티 유스(Multi Use) 전략의 파생물인 타분야 연예인들의 연기분야 진출은 방송소비자인 시청자들을 우롱하는 처사일 수 있다.

그와 같은 연예인들의 드라마 진출이나 연기겸업은 애초 검증되지 않은 연기력으로 시청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극 중 장면, 봉순(유진)이 돈이 든 가방을 소매치기 당하고 서울역 앞을 헤매고 있다.
극 중 장면, 봉순(유진)이 돈이 든 가방을 소매치기 당하고 서울역 앞을 헤매고 있다.MBC
한참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으면서 연기력까지 겸비한 스타들의 연기진출을 시청자로서 반기지 않을 이유는 없다. 차승원이나 강동원, 현빈 같은 모델 출신들이나 신화의 에릭이나 비처럼 연기분야 연착륙에 성공한 스타들의 진출이 가뜩이나 연기 자원이 부족한(제법 연기력 있는 연기자들은 몽땅 영화계에 빼앗긴 현실에서는 특히나) 방송시장에 활력을 주는 긍정적 효과도 부인할 수 없다.

문제는 가수나 다른 분야에서 생명이 끝난 인물들이 연기분야에 진출하여 어설픈 연기로 극의 완성도를 떨어트리는 경우다. SES의 유진이 김재원과 호흡을 맞춰 '원더풀 라이프'에 출연하였을 때의 인상이 기자에게는 그랬다.


가수였을 때에도 기자에게 유진은 미디어가 만들어낸 이미지의 허상에 불과하였다. '바다'가 그나마 겨우 가수 체면을 유지하는 아이돌 그룹이란 인상을 받았을 뿐이었다.

당시 그에게서는 극 중 배역인 미혼모의 슬픔이나 역경을 헤치는 의지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잘은 모르지만 극 자체도 오늘날 젊은이들의 사랑 풍속도를 그리겠다는 애초 의도는 거의 살리지 못하면서 지리멸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극 중 그녀는 어디서 왔는지 모를 이방인처럼 낯설기만 하였고 국경과 인습을 초월한 사랑을 내세운 드라마답게 생소함과 생경함만을 전달하는 성과를 거두고 말았다. 그 혁혁한 성공의 일등공신은 누가 뭐래도 유진이라 말하면 너무 가혹한 평가일까.

달라진 유진-연기자로서의 가능성 보여

횡단보도라는 말을 알아 듣지 못해 봉순이 무단 횡단을 하는 장면, 아무리 산골 소녀라지만 너무 희화화되어 있는 것 같다.
횡단보도라는 말을 알아 듣지 못해 봉순이 무단 횡단을 하는 장면, 아무리 산골 소녀라지만 너무 희화화되어 있는 것 같다.MBC
그런 그가 이번에는 확 달라진 인상으로 기자의 눈에 들어왔다. 극 중 강원도 산골 출신의 고아 여봉순을 연기하면서 구수한 강원도 사투리를 능청스럽게 잘 소화했대서 내리는 평가만은 아니다.

어색하고 경직되어 있던 그의 표정이 훨씬 자연스러워졌고 눈망울에 일렁이던 불안의 그림자는 많이 자취를 감추었다. 물론 그의 사투리 구사 연기의 자연스러움과 능청스러움이 그런 인상을 준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드라마를 보다가 갑자기 기자는 한 소녀가 떠올랐다. 한 때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키다 무책임한 미디어의 관심이 한 어린 소녀의 삶을 비극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산골소녀 영자' 말이다.

미디어의 일회성 관심의 희생양이 되어 아버지를 잃고 출연한 휴대폰 광고 속의 세상과는 전혀 다른 불문의 비구니로 입문해야 했던 영자의 비극이 할머니를 잃은 극 중 봉순의 눈물과 그가 부르는 애잔한 강원도 민요에서 묻어났다.

그만큼 그의 연기가 달라졌고 농익어 가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촌스런 의상과 거위가 들어 있는 커다란 봇짐을 걸머지고 버스에 올라 운전기사와 다투는 장면은 압권이다.

수세식 화장실의 사용법을 몰라 고민에 빠진 봉순이 변기에 거꾸로 걸터 앉은 장면
수세식 화장실의 사용법을 몰라 고민에 빠진 봉순이 변기에 거꾸로 걸터 앉은 장면MBC
맨 얼굴에 커다란 눈망울, 그리운 할머니를 회상하며 불러대는 민요 가락은 캐스팅이 돋보이게 하는 연출의 솜씨다. 거기에다 산골소녀의 어눌한 상경을 뒷받침하는 그의 사투리 구사는 달라진 유진을 확인하기에 충분하다.

강원도 출신 개그맨(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이 유행시키기 시작한 강원도 사투리는 그 정겨운 억양과 '~했더래요'의 서술형 어미로 우리에게 강원도 산골의 넉넉한 인심처럼 다가온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의 주인공들이 '그랬니' '저랬니' 하는 서울 말씨(표준어)로 남과 북으로 갈라서 다투었더라면, 과연 그 영화가 이념의 전쟁터에 꽃 핀 인간의 발견, 인간성의 회복이라는 극적 테마를 제대로 구현할 수 있었을까? 무거운 주제를 그처럼 희화하면서 우리에게 재미와 감동을 선사할 수 있었을까.

무대이건 스크린이건 또는 브라운관이건 극과 인물을 결정하는 것은 곧 대사이고 이는 언어가 주는 마력 같은 것이다. 하물며 작중인물이 구사하는 사투리는 그 인물의 성격과 출신 그로 인한 인생의 유전까지를 결정하는 요소다.

사투리, 곧 방언은 한 언어체계 안에서 갈라진 파생적 언어다. 방언을 형성하는 일차적 요인은 지역적 격리성이다. 또한 사회적 계층방언인 경우는 화자가 속한 사회 내부의 계층을 대변한다.

사투리를 쓴다는 것은 지역적인 단절이 전제된 환경을 나타내고 그것은 한 사회 내부에서조차 다른 문화권이 존재한다는 것에 다름아니다. 또한 사투리의 자연스런 구사는 일시적인 학습에 의해서 가능한 것도 아니다. 오랜 시간 그 고장에서 살아온 후에야 가능한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라도에서 '거시기'는 어떤 대화에 사용되어도 의미해독에 지장이 없다. 물론 그 지역에 산 사람들의 경우다. 앞뒤 문맥을 통해 거시기는 거의 모든 것을 지칭할 수 있는 마법의 낱말로 기능한다.

우리 영화의 흔한 소재인 조폭을 그린 영화에서 주인공이 사투리를 구사하는 것은 바로 극 중 인물을 관객에게 각인시키는 중요한 극적 기제다.

한편으로는 우리의 조폭 역사가 전라도와 부산(경상도) 출신의 주먹들에 의해 형성되고 이어져 왔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만큼 말투와 말씨는 인간의 내면과 실제 생활상까지도 생생하게 비추는 거울 같은 것이다.

그 사투리를 의뭉스러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유진을 보면서 적어도 그가 극과 극 중 배역에 쏟는 열정을 발견할 수 있어 좋았다. 치열한 노력의 결과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극의 홈피에는 사투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자막을 넣어달라는 애교성 짙은 시청자들의 요구가 쇄도하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 정도면 유진의 변신과 연기력에 일단 합격점을 주어도 좋지 않을까.

기상캐스터 출신 안혜경의 연기자 데뷔, 극의 타이틀인 '진짜 진짜 좋아해'가 주는 여러 추억들(70년대 말 유행했던 하이틴 영화며 혜은이와 길옥윤의 환상결합 등)에다 어설펐던 한 아이돌 스타의 달라진 모습을 보는 재미에 한동안은 주말이면 TV 앞에 앉아 있어야만 할 것 같다.

연기자로 변신한 기상캐스터 출신 안혜경. 극 중에서는 청와대의 영양사로 등장하여 이민기(경호원)와 사랑의 줄다리기를 할 듯.
연기자로 변신한 기상캐스터 출신 안혜경. 극 중에서는 청와대의 영양사로 등장하여 이민기(경호원)와 사랑의 줄다리기를 할 듯.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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