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색깔로 아름다운 북경의 제자들

[아이들에게 멍석 깔아주기 3] 열정과 감동의 논문발표대회

등록 2006.04.24 10:46수정 2006.04.24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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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우리나라 교육 정책이 나가야 할 방향'이라는 주제로 논문을 발표 하는 김윤빈 학생.

'우리나라 교육 정책이 나가야 할 방향'이라는 주제로 논문을 발표 하는 김윤빈 학생. ⓒ 정호갑


a 북경한국국제학교 고등부 학생들의 논문집 '작은 새의 날개 짓'

북경한국국제학교 고등부 학생들의 논문집 '작은 새의 날개 짓' ⓒ 정호갑

지금껏 아이들에게 깔아준 멍석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지난 1월 북경한국국제학교 고등부 2학년의 논문발표 대회였다. 이 논문발표대회는 북경에 있는 한국문화원에서 '작은 새의 날개 짓'이라는 주제로 열렸다. 고등학교 2학년에게 무슨 논문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솔직히 고백하면 대학교 졸업 논문보다 우수한 것이 많았다.

북경한국국제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 2학년을 대상으로 논문쓰기 수업을 하면서 아이들이 얼마나 자기 논문에 애정을 가지고 있었는지 나는 안다. 그 애정에는 그들의 땀이 녹아 있었다. 아이들 스스로 관심 분야를 찾아 밤을 새워 원고지 칸을 메우고, 몇 차례의 수정을 거치면서 지우고 새로 고쳐 쓰면서 이룩한 논문이다. 이것을 어떻게 그냥 지나갈 수 있단 말인가? 그러기에 아이들에게 한 마당을 마련해주고 싶었다.

<논문쓰기> 수업을 시작할 때는 나도 처음 해보는 수업이기에 제대로 될까 싶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너무 잘 했다. 스스로 관심 분야를 찾고 그에 대한 조사와 근거를 마련하고 자기 생각도 덧붙인다. 그리고 친구들의 논문을 돌려가며 읽고 수정해 준다. 그저 곁에서 바람만 조금 잡아줘도 아이들 스스로 알아서 다 한다.

특히 이종배는 고등학교 생활을 논문에 걸었는지 매우 열성적이다. 학교 성적은 조금 뒤처지지만 자기 논문에 대한 열정 하나만은 최고였다. 그의 논문 주제는 'E-SPORT 문화에 열광하는 이유'였다. 나에게는 E-SPORT란 말이 낯설었는데 이종배로 인해 임요환이라는 선수까지 알게 되었다.

공부보다는 게임에 관심을 많이 가졌던 이종배. 그로 인해 학업 성적이 많이 뒤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 게임에 관한 관심을 한 편의 논문으로 승화시켰다. 한국에서 오신 아버지에게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 조금 긴장했지만 그래도 진지한 그의 논문발표 모습을 보면서 뿌듯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이종배를 보면서 "잡초란 아직 그 가치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풀" 이라는 애머슨의 정의를(황대권의 <야생초의 편지>에서) 다시 한 번 새기게 된다. 교사란 아이들과 함께하면서 아이들의 가치를 인정하여 주고 찾아내 드러내어 주는 것이리라.

김희진이가 쓴 '조기 유학생들의 대학 진로에 관한 연구' 논문은 정말 수준이 높았다. '중국 거주 기간에 따른 선호하는 대학', '유학 동기에 따른 선호하는 대학', '현재 다니고 있는 고등학교에 따른 선호하는 대학', '대학 졸업 후 예상 거주 지역에 따른 선호하는 대학'으로 나누어 설문 조사하고 그 자료를 면밀하게 분석하여 논문을 완성시켰다. 마무리에서는 설문 조사의 한계와 앞으로의 과제까지 언급한 뛰어난 논문이었다.


앞으로 미술을 공부할 임지혜는 '환경과 대지미술'이란 논문을 통해 '대지미술'이라는 낯선 분야를 소개하여 주었다. 사회복지 분야에 관심이 많은 이영아는 '한국 난민 수용정책에 대한 연구'로 우리나라의 난민 정책에 대한 소극성을 지적하였다. 시사에 관심이 많은 이문규는 '대한민국과 삼성의 함수 관계'로 앞으로 삼성이 나가야할 방향을 제시하였다. 교육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는 김윤빈은 '우리나라 교육 정책이 나가야 할 방향'이라는 주제로 우리 교육의 잘못된 방향과 나가야 할 방향을 고등학교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그대로 담아내었다.

그리고 박지훈은 '돌연변이의 활용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돌연변이는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활용할 수 있음을 역설하였고, 최주경은 '심리테스트가 유행하는 이유'로 혈액형 심리테스트는 과학적 근거 없음을 밝혀주었다.


아이들의 논문발표대회를 지켜보면서 위로가 되었던 것은 대사관에 근무하는 임대호 교육관의 모습이었다. 아이들이 발표를 시작할 때부터 말없이 뒷자리에 앉아서, 4시간여 동안 자리를 전혀 뜨지 않고 아이들의 발표를 지켜봤다. 아이들의 진지한 모습과 논문 수준에 놀라워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아이들 논문에 대해 자신은 있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논문의 질을 탓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약간은 긴장 했었다.

논문발표대회 마무리 시간에 사회자가 느닷없이 나를 소개한다. 앞에 나서는 것 특히 마이크 잡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어리둥절한 채 앞으로 나갔더니 아이들이 일어나 박수로 맞아준다. 무슨 말인지 기억나지 않은 말 몇 마디를 하고 내려왔다.

집에 돌아온 나는 아이들이 너무 발표를 잘해 주었다는 대견함 그리고, 그동안의 긴장감이 풀어지면서 모처럼 편안한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조금 뒤에 한 통의 전자 우편이 논문발표 상황을 다시 전해주었다. 북경에서 있는 동안 가까이 다가가 배우고 싶었던 고재석 선생님이 보내온 내용이다.

a 논문 발표에 앞서 격려 하는 김태선 교장 선생님.

논문 발표에 앞서 격려 하는 김태선 교장 선생님. ⓒ 정호갑

신선호 선생님 왈 : "이분을 늘 곁에서 지켜보았습니다. …… 정호갑 선생님이십니다." 환호성과 함께 아이들은 하나 둘씩 일어나 박수를 친다.

논문발표회가 끝난 그곳의 모습입니다. 갑자기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다시 보기 하고 있는 느낌이었답니다. 그러곤 짠한 마음과 함께 눈물이 두 눈가에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부끄러워 살짝 고개를 숙였습니다. 최수현 학생의 '눈물의 미학'이란 논문을 감명 깊게 들었음에도 그 동안의 버릇 때문인지 아직 고여 있는 그것을 그대로 내려버리지 못했습니다.

정호갑 선생님.

너무나도 당당한 아이들의 모습, 그리고 아름다운 선생님의 모습에, 돌아오는 길이 참 따뜻하고 가벼웠습니다. 또 그 아름다움과 당당함은 결코 그냥 대충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정성스레 준비하고 가꾸어 온 것이기에 더 감격스러웠습니다.

돌아와서 바닥에 배 깔고 한 편 한 편 다시 읽었습니다. 정직한 글쓰기, 치밀한 자료 조사, 튼튼한 구성, 톡톡 튀는 문제의식과 관점 등, 이것이 진정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의 글인가 라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도 논문을 쓰고 있는 처지이기에 관심과 함께 약간의 거만함을 가지고 그곳에 갔었는데, 참 부끄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한 명 한 명의 아이들과 좋으신 선생님, 그리고 그런 환경을 제공해주는 국제학교에게 기립박수를 드립니다. 세상이 아무리 힘들게 돌아가고 왜곡이 판친다 한들, 아직 우리는 참을 구별할 눈과 마음을 잃지 않고 있음은 분명했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도록 저도 순간순간을 아끼며 살겠습니다.


아이들의 분위기를 띄워 줄 작정으로 마련된 것인데 내가 그만 뜨고 말았다. 역시 아이들은 나보다 한 수 위이다.

3년간의 북경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지 두 달이 다 되어간다. 곁에 있는 동료들이 적응이 다 되었느냐고 묻는다. 그 물음에 다른데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배우고 가르쳤는데 적응하고 말고 할 것이 뭐 있겠느냐고 되묻는다.

가슴 한켠에 남아 있는 아쉬움 하나. 아이들에게 멍석을 깔아주기가 우리보다 (북경의 한국국제학교가) 훨씬 쉽다는 것. 여기서도 틈만 나면 아니 틈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멍석을 깔아주기 위해 애를 쓸 것이다. 그러면 아이들은 나름대로 자기의 삶을, 생각을 펼치면서 자기를 드러내고 찾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논문발표대회를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으시고 밀어주신 북경한국국제학교 김태선 교장 선생님과 하무용 고등부장 선생님께 그 때 전하지 못하였던 고마움을 지금 다시 전합니다.

덧붙이는 글 논문발표대회를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으시고 밀어주신 북경한국국제학교 김태선 교장 선생님과 하무용 고등부장 선생님께 그 때 전하지 못하였던 고마움을 지금 다시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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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함께 배우고 가르치는 행복에서 물러나 시골 살이하면서 자연에서 느끼고 배우며 그리고 깨닫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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