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후 이 잣을 딸 수 있을까요"

'북녘 묘목지원 및 남북공동 나무심기' 참가기

등록 2006.04.25 12:20수정 2006.04.25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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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북측 민화협 관계자들이 잣나무를 심고 있다.

북측 민화협 관계자들이 잣나무를 심고 있다. ⓒ 한성희

a "우리가 심는 이 잣나무 열매를 따러 와야지!"

"우리가 심는 이 잣나무 열매를 따러 와야지!" ⓒ 한성희

"조국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개성 선죽교 공원에 잣나무를 심은 뒤 한기덕씨는 이렇게 말했다. 한씨는 비무장지대에 철도건설을 추진하는 특정 비영리활동법인인 삼천리철도(회장 도상태) 사무국장으로 북녘 땅에 나무를 심기 위해 일본 나고야에서 달려왔다.

지난 21일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이하 민화협)가 북한 산림녹화를 위해 마련한 '북녘 묘목지원 및 남북공동 나무심기' 행사가 열렸다. 참가자들은 개성 자남산 부근 선죽교 공원에 3년생 잣나무를 심었다.

이날 아침 서울에서 출발한 참가자들은 버스를 타고 임진강을 가로지르는 통일대교를 건너 도라산역 남북출입사무소를 거쳐 육로로 개성에 도착했다. 행사에는 학계·문화계·종교계 인사 등 남측 민화협 회원 100여명과 배기선 열린우리당 의원, 일본에서 활동하는 삼천리철도 소속 재일교포 회원, 북측 민화협 관계자 등 130여명이 참가했다.

"요즘 일본 보수언론은 납치 사건을 들춰내 헌법 개정에 이용하고 있습니다. 재일동포(한씨는 교포가 아니라 '동포'라고 강조했다)들도 언론보도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지요. 이 일이 (동포들에게) 안 좋은 일도 있지만 어쨌든 우리에게 조국은 남과 북 중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지요."

한씨는 육로로 처음 북녘 땅을 밟았다는 사실이 너무 감격스러워 가슴이 벅차다고 했다. 4년 전 경의선 철도 복원사업 당시 남과 북에 680만엔씩 전달했던 일본 삼천리철도는 앞으로도 지속해서 북한 나무심기를 지원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고향 땅 밟을 생각에 한 잠도 못 잤어요"


a 개성에 도착해 나무를  심으러 선죽교 공원으로 향하는 민화협 회원들.

개성에 도착해 나무를 심으러 선죽교 공원으로 향하는 민화협 회원들. ⓒ 한성희

a 선죽교를 건너 공원에 잣나무를 심었다.

선죽교를 건너 공원에 잣나무를 심었다. ⓒ 한성희

a "신부님, 너무 밟으면 나무가 숨을 못 쉬어요." 홍창진 신부(오른쪽)가 잣나무를 심고 발로 다져 밟고 있다.

"신부님, 너무 밟으면 나무가 숨을 못 쉬어요." 홍창진 신부(오른쪽)가 잣나무를 심고 발로 다져 밟고 있다. ⓒ 한성희

이날 민화협은 3년생 잣나무 10만 그루, 2년생 소나무 5만 그루, 1년생 느티나무 3만 그루 등 묘목 18만 그루와 식재 관련 물품을 북측에 전달했다.

북측에 전달한 묘목과 지원품은 민화협과 세계여성연합, 일본의 삼천리철도 등에서 지원한 것이다.


"완벽하게 수평을 맞춰 심었지. 나무는 수평을 잘 잡아줘야 한다고. 이만한 수평 나무심기 봤어?"
"신부님, 너무 다지면 나무가 숨을 못 쉬어요."

심은 잣나무를 발로 꼭꼭 다지던 홍창진 신부(천주교수원교구, 민화협 사무국장)는 웃음을 터뜨렸다. 화창한 봄 햇살이 선죽교에 내려와 와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들의 머리에 머물렀다.

"개성에 갈 생각을 하니 너무 흥분해서 어제 밤새 한잠도 못 잤어요."

빨간 봄 코트를 입은 멋쟁이 할머니 장명자(71)씨는 연방 시큰해진 콧날을 비비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MBC <통일전망대> 방송팀과 함께 나무심기 행사에 참석한 장씨는 개성에 오기 전날 가슴이 두근거려 밤새 잠을 못 잤다고 되뇌었다.

1950년 선죽국민학교(현 선죽중학교)를 졸업하고 정화여중에 입학했던 장씨는 전쟁이 발발하자 가족과 함께 개성을 떠난 후 이번에 처음으로 고향땅을 밟게 됐다고. 중학교 1학년이던 14살 때 한국전쟁이 일어나 고향을 떠난 장씨는 56년 만에 찾은 개성의 이곳 저곳을 돌아보며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회상에 젖었다.

a 장명자씨가 개성으로 향하던 도중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에서 여권을 들여다보고 있다.

장명자씨가 개성으로 향하던 도중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에서 여권을 들여다보고 있다. ⓒ 한성희

"변했지만 거리는 다 알아볼 수 있어요. 오늘 심은 나무에서 8년 후에 잣을 딴다는데…."

장씨는 남대문·선죽교·성균관을 찾을 때마다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다녔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8년 후 잣을 딸 때까지 계속 이곳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고향의 생태복원을 위한 나무심기 사업을 계속 도울 예정이라고 한다.

오늘 심은 나무들이 숲을 이룰 때쯤이면...

"우리는 하나입니다. 우리가 심은 이 나무들이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고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한마음으로 심은 나무처럼 민족끼리 하나로 단합해 통일을 위해 손잡고 나갈 것입니다."

나무심기가 끝난 뒤 점심이 차려진 '자남산 려관'으로 자리를 옮긴 참석자들은 정덕기 북측 민화협 부위원장의 인사에 힘찬 박수를 보냈다. 휠체어를 타고 참가한 윤재철 남측 민화협 상임의장의 답사가 이어졌다.

"조국통일을 향한 무궁한 발전을 오늘 나무심기에서 보았습니다. 민족화해와 조국통일을 향해 점진적인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휠체어를 타고 나무를 심은 윤재철 상임의장은 대한민국상이군경회 고문이기도 하다. 이날 행사에는 보수단체인 상이군경회원들도 다수 참가해 나무를 심었다. '강경보수 단체에서 어떻게 여기 참가할 생각을 했느냐'는 기자의 짓궂은 질문에 그들은 활짝 웃으며 답했다.

a 자남산 려관에서 정덕기 북측 민화협 부위원장이 행사 참석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자남산 려관에서 정덕기 북측 민화협 부위원장이 행사 참석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 한성희

a "우리는 동일민족이며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말아야지요." 활짝 웃는 윤재철 남측 민화협 상임의장과 대한민국상이군경회원들.

"우리는 동일민족이며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말아야지요." 활짝 웃는 윤재철 남측 민화협 상임의장과 대한민국상이군경회원들. ⓒ 한성희

"개성에 오고 싶어서 왔습니다. 참여하니 너무 좋았어요. 같은 민족으로 연대의식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그 유명한 대한민국상이군경회 전 회장"이라고 장난꾸러기 소년처럼 눈을 찡긋하며 자신을 소개한 윤재철 상임의장은 한국전쟁에서 잃은 자신의 다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전쟁 때문에 다리가 이렇게 되는 사람이 또 나와서는 안 되겠지요. 우리 민족은 하나이고 우리 세대에 통일을 못하면 다음 세대에 통일을 할 수 있게 기반을 조성하는 데 일익을 담당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민화협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민화협은 이번 행사를 계기로 생태복원과 농업기반 복원을 위한 '산림녹화 사업'을 회원단체와 관련 기업, 국민들이 참여하는 범국민 사업으로 펼쳐나갈 계획이다.

돌아오는 길에 방문한 개성공단 공장에서는 북측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었다. 남북 경제협력이 가시화되고 있는 현실이다. 개성공단 건너편에 보이는 잿빛 북녘 산야가 남측에서 심은 나무들로 푸르게 덮이면 민족 간의 오랜 갈등도 푸른빛으로 변하리라.

a 개성공단에 입주한 (주)신원 에벤에셀에서 300명의 북한 노동자들이 봉재일을 하고 있다.

개성공단에 입주한 (주)신원 에벤에셀에서 300명의 북한 노동자들이 봉재일을 하고 있다. ⓒ 한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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