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잘 그리고 싶어요"

[별★난루키 2] <습지생태보고서>의 최규석 작가

등록 2006.04.24 18:39수정 2006.04.25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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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눈부신 꽃망울을 피워내는 사람들, 그러나 앞으로의 빛깔이 더욱 기대되는 사람들. '별★난루키'는 출중한 실력에 넘치는 가능성을 가진 젊은 만화가들을 만나보는 코너입니다. - 기자 주

미셀 투르니에는 산문집 <외면일기>에서 '숲을 증오하는 나무'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나와 남, 그리고 집단. 인간은 타자에게 쉬이 상처받고, 그 상처를 가까스로 견디며 살아간다. 그런데도 자신보다 약한 것은 쉽게 짓밟고, 기득권을 포기할 줄 모르며, 어떻든 대세에 자기를 싣는 것은 인간의 처량한 습성이다.


그런데 아이러니 한 것은 경계다. 세상 모든 사람을 총을 쏜 사람과 총을 맞은 사람으로만 구분한다면 과연 나는 어디에 설 수 있을까.

장마철이면 방바닥에 물이 고이는 지하 단칸방 '습지'에 기거하는 네 청춘, 아니 사슴(녹용이)까지 다섯 청춘. 가난한 그들은 "하위종의 남루함을 자랑으로 여기지는 않지만 딱히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더욱이 "이종으로서의 의태가 가능한 상황 하에서는 순간적으로 행동 양식이 돌변"하는 이글거리는 욕망을 지닌 것이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a <습지생태보고서>표지(왼쪽), <습지생태보고서>의 '의태' 편. 상황만 된다면 언제든 `이종`으로서의 변이와 의태가 가능한 인간의 욕망을 유머러스하게 그려내고 있다(오른쪽)

<습지생태보고서>표지(왼쪽), <습지생태보고서>의 '의태' 편. 상황만 된다면 언제든 `이종`으로서의 변이와 의태가 가능한 인간의 욕망을 유머러스하게 그려내고 있다(오른쪽) ⓒ 최규석

최규석은 철저한 자기반성과 현실에 대한 예리한 시선, 그리고 날선 적확한 표현으로 만화 <습지생태보고서>(이하 <습지>)를 완성해냈다.

독자들은 "밍밍한 인스턴트식품만 먹다가 제대로 된 밥 한 끼 먹는 기분"(귤)을 느꼈다. "눈물을 쏙 뺄 만큼 웃기지만 때론 진지한 성찰을 하게 만드는"(두둥깽) <습지>에 그들은 "지극히 현실적인 픽션, 삐삐 같은 개그에 몸이 뒤로 접혔다"(펭3). 그들은 입을 모아 "토종 한국만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야생꽃미남작가 최규석을 주목하라"(chachy)고 말한다.

"글쎄요, 사실은 연재하는 동안에도 굉장히 꺼림칙하긴 했어요. 그중 괜찮은 에피소드는 얼마 안 되는 것 같아서요. 그런데 이런 얘기도 가능하다는 건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겠죠. 뭔가 <습지> 같은 이야기를 바라고 있지 않았을까요?"

<습지>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길 원하지 않는다. 그래도 자신을 빼닮은 까칠한 '최군'처럼 사회적 모순에 괴로워하는 젊은이들에게 작은 위로가 됐으면 한다.

현실을 도피하지 않는다


a 최규석 작가

최규석 작가 ⓒ 홍지연

군입대 전 시험하듯 낸 작품 <솔잎>은 범상치 않은 신예의 탄생을 예고했다. 이 작품으로 그는 1998년 서울문화사 신인만화 공모전 성인지 부문 금상을 거머쥔다.

군입대로 보낸 2년여의 공백기 실력은 곧 상복으로 이어졌다. <콜라맨>으로는 2002년 동아 LG 국제 만화 페스티벌 극화부문 대상을 차지했다.


"더 이상 명랑만화의 주인공이 아닌" 남루하고 측은한 둘리가 등장, 궁핍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줘 화제를 모았던 <공룡 둘리>와, 어두운 현실 속 우리 모습을 다시 느끼게 해준 <콜라맨>과 <선택>. 이들 단편들을 모아 졸업 전 단행본(<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을 내는 당시로서는 보기 힘든 위업도 달성했다. 2003년에는 21세기를 이끌 우수인재 대통령상과 독자만화대상 신인상을, 그 이듬해에는 대한민국 만화대상 우수상을 받았다.

현실에 대한 담담한 좌시, 그동안의 만화작품 속에서는 나오지 않던 이야기에 유머까지 갖췄다. 묵직한 단편으로 대변되는 그의 작품세계에 만화평론가 김낙호는 최규석의 만화와, 그의 방식에 대해 이렇게 칭찬하고 있다.

"최규석의 잠재력은 단순히 '어둡고 현실적인 이야기를 잘 한다'는 정도의 것이 아니다. 진정한 치열한 고민은 더욱 진행될수록, 전체적 시각과 여유를 낳는다. 그리고 여유는 유머를 만들어준다.… '리얼리즘'이라는 흔한 용어로는 묶어내지 못하는, 비굴한 현실과 만화의 상상력을 자연스럽게 엮어내는 이야기꾼의 매력이다."

나를 만화로 이끈 건 내가 아니다

그는 "만화가는 참 이상한 직업"이라며, "그토록 원한 데뷔인데, 데뷔하고 나서는 오히려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잘 모르겠다"고 말한다.

차라리 급격한 '성장통'을 앓던 데뷔전이 그립기도 하다. 하루 연습하면 확 늘고, 늘고 있다고 생각하면 밥을 먹고 잠을 자면 모두 잊어버리지나 않을까 노심초사 했던 때가 있었다. 독자의 반응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지금보다 훨씬 행복했던 그때였던가.

팔 할이 '주변반응' 덕이다. 그를 만화가로 키운 건, 결코 스스로가 아니었다.

학창시절, 한 반에 꼭 한두 명은 있는 '만화 그리는' 아이였지만 만화를 하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공부도 곧잘 했고, <토지>나 <가시나무새> 등을 즐겨 읽던 문학소녀 누나들 틈바구니에 자라 그의 말을 빌리자면 "건방진 꼬맹이"였다. '만화가 따위'는 하지 않겠다던.

중학교 1학년 때 만화 <터치>(아다치 미츠루 작)의 말없이 내면을 그려내는 연출법에 반했으면서도, <아키라>(오토모 가츠히로)의 세련된 그림체를 동경하면서도 결코 만화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적은 없다.

a <습지생태보고서>가 사회적 모순으로 괴로운 청춘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길 최규석은 바란다.(왼쪽), 더 이상 명랑만화의 주인공이 아닌 '공룡 둘리'를 현실로 끌어내 남루하고 처참한 현실을 그려낸 수작 <공룡 둘리>(오른쪽)

<습지생태보고서>가 사회적 모순으로 괴로운 청춘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길 최규석은 바란다.(왼쪽), 더 이상 명랑만화의 주인공이 아닌 '공룡 둘리'를 현실로 끌어내 남루하고 처참한 현실을 그려낸 수작 <공룡 둘리>(오른쪽) ⓒ 최규석

상명대학교 만화학과에 들어온 것도 '새로운 학문'에 대한 도전 같은 것이었다. 그는 이 새로운 학문의 교수가 될 줄 알았다. 아버지가 아파트 경비원이 아니셨으면, 그 아파트에서 친한 미대교수를 알지 않으셨으면, 그리하여 집안이 반대하던 만화학과와의 인연이 끊겼다면 그는 만화가가 되지 않았을까. 부모님의 바람대로 교원대에 들어가 미술선생이 되었을까.

삶에 가득 들어찬 변수들은 그를 단단히 다지면서도, 만화를 향한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게 해줬다. 그에게서 가능성을 발견한 사람들이, 상을 주며 독려했던 사람들이, 잘한다고 칭찬하고 우쭐하게 만들었던 사람들이 그를 지금에 오도록 했는지도 모른다.

"사람을 잘 그리고 싶어요."

최규석은 최근 새 연재를 시작했다. 두 번째 연재다. 가난한 경상도 2남4녀 가족이 주인공인 새 연재의 목표는 '궁상스럽지만 자연스런 우리 본래 모습'을 그려내는 것. 주간 <한겨레21>에 모습을 보일 참이다.

어린 시절, 시골 어른들은 기르던 개가 쥐약을 먹었을 때 생감자를 갈아 먹여 개를 살리고자 했었다. 조그만 텃밭이라도 생기면 노인들은 푸성귀 한 뿌리라도 심었다. 그땐 그리도 자연스럽던 풍경이 지금은 왜 이렇게 이상하게 보이는 걸까. 우리 삶은 대체 누구의 눈으로 재단되고 있는 것일까. 새 연재를 시작하는 최규석의 물음이다.

"사실 왜 이런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이런 접근은 난생 처음이라 될지 안 될지도 잘 모르겠고, 뭐가 나올지도 모르겠어요. 굉장히 싱겁고 진부한 얘기로 중간에 그만둘 수도 있을까 약간 무섭기도 해요. 어떻든 색다른 경험이 되겠죠?"

그리고 어렴풋이 '희망을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지금껏 그려온 듯 내재된 형태가 아니다. 당당히 작품 속을 활개치고 다닐 새로운 월척은 공식적으로 '희망'이란 놈이다.

불안한 작가 생활에 서울 생활을 접고 경향신문에 <습지> 연재를 시작하면서 내려갔던 고향 창원. 작가는 '적당한' 돈이 모였을 때 '잘나가던' 연재를 마무리했다. 그 대신 전세방을 마련해 상경, 부천에 정착했다. <습지>의 작가후기에서처럼 그에게 가난은 "견뎌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방식일 뿐"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만화가 이두호는 그 기질을 높이 사 한 번 만나고 싶다 말했던가.

다시 올라온 최규석은 장편을 준비 중이다. 사실 연재를 시작한 것도 장편을 쓰기 위함이다. 지금 한국사회에 꼭 필요한 이야기를 꺼내 들려고 한다. 가난하고 무식한 중학생 아이들이 주인공이 돼 우리 사회의 모순을 들추는 이야기가 될지…. 그러나, 아직 정해진 건 없다. 천천히 생각해보자.

더 힘이 들더라도 남 눈치 안 보고 하고 싶은 얘기 하는 게 즐겁다. 사회에서 말하는 '어른'이 못 되더라도 괘념치 않는다. 가끔 이 칸에서 저 칸으로 아주 잘 넘어갈 때 느껴지던 희열만큼만 지켜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리고 사람을 잘 그려내는 작가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최규석이 만화를 그리는 이유이니까.

"사람을 제대로 그리고 싶어요. 어려운 사람이든 쉬운 사람이든 캐릭터라는 것을 잘 드러내고 싶어요. 어릴 때부터 꿈이었어요. 정말로 설명이 안 되는 인물들이 있잖아요. 내가 저 사람을 그린다면 독자들도 나와 똑같은 감정을 느낄까 하는 호기심도 생기고요. 인간의 복잡한 면을 설명이 아니라 그대로 보여주고 싶어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처럼? 옛날 사람들이 이미 다 했죠.(웃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CTNEWS에도 실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CTNEWS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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