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림원
이탈리아의 문학 거장 알베르트 모라비아(1907~1990)의 <선사시대 사랑이야기>는 일단 시대 배경이 평범치 않은 우화집이다. 세상이 이기적인 인간들에 의해 피폐해지기 이전인 선사시대를 배경으로 동물들 사이에 이루어진, 혹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이야기를 통해 신과 자연 그리고 인간의 '좌충우돌 공존'을 그렸다.
우화를 읽기 전에 먼저 모라비아가 누군지 궁금하다. 모라비아는 이탈리아 출신 소설가로 문학사에서 그의 위치는 단단하다. 그는 22살 때 이탈리아 중산층의 부패와 무기력한 삶을 그린 <무관심한 사람들>로 문단에 나왔다. 이후 파시스트 정권하에서 <가장무도회> 등을 발표하지만 발매를 금지당하는 정치적 탄압을 받기도 했다.
그 때문일까. 이후 발표되는 <로마의 여인> <고독한 청년> <권태> 등은 도발적이고 악의적 비극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그의 글을 한번쯤 접한 독자라면 이번 우화집에서 드러난 '뜻밖의' 변화에 고개를 갸우뚱할지도 모른다. 치열한 리얼리스트인 그가 한갓지게 우화라니.
<선사시대 사랑이야기>는 1982년에 발표됐다. 모라비아가 1990년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으니 그의 나이 75세에 쓴 글이다. 말년 작품인 셈이다. 도발과 악의적 비극으로 천착했던 작품세계를 우화로 마무리한 것이다. 거장다운 발상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책은 거장의 마지막 내공을 펜 끝에 모아 날린 듯, 가벼운 우화 속에 묵직한 교훈의 무게가 느껴진다.
가볍게 읽혀지는 우화, 느껴지는 묵직한 교훈
모라비아는 가만히 앉아서 물고기를 한입에 잡아먹으려는 게으른 악어, 그릇된 신념을 고집하는 펭귄, 황새를 사랑한 올빼미, 자기가 어떤 동물인지 모르는 기린, 벼룩에게 당해 자멸하는 디노사우루스 등을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등장시킨다.
어미 품속에서 온실의 화초처럼 자라서 홀로 먹이를 잡을 수 없는 게으른 악어에게 공생관계의 악어새는 멋진 이벤트를 준비한다. 악어의 커다란 입 속에서 물고기들의 무도회를 열기로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벤트는 계획대로 진행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실패한다.
악어의 입속으로 물고기를 불러 모으기는 성공했다. 하지만 악어가 끝내 군침을 억제하지 못해 침을 뚝뚝 흘리는 것을 눈치 빠른 철갑상어에게 들켜버린 것이다. 물고기들은 악어의 입을 모두 빠져나갔고 악어는 오랫동안 입을 벌리기 위해 괴어 둔 주먹만한 바윗돌을 애꿎게 씹었지만 자기 손해였다.
이후 악어가 무도회를 연다는 말에 누구도 속지 않았고 배고픈 악어는 나일강변 모래위에서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 이것이 바로 악어의 눈물이 된 것이다. 악어와 더 이상 공생할 수 없는 악어새는 떠났고 무도회에 참석했던 도요새가 지나면서 말했다. 욕심이 과했다고.
동물들의 이야기, 인간 군상의 세상을 대변하다
단번에 그간의 배고픔을 만회할 수 있는 '한방'을 노린 악어의 얼굴 너머로 로또의 대박을 기다리는 우리네 모습이 설핏 스친다. 우화는 이처럼 우리에게 동물들의 탈을 씌우고 우스꽝스러운 삶을 반성하는 교훈을 느끼게 한다.
일반적으로 우화는 인간과 친숙한 동물들을 등장시켜 이들의 몸을 빌려 이야기하고 그것을 인간에게 되돌려주는 구조로 돼 있다. 때문에 소재의 제약을 받지 않아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다.
다만 인간성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이 없거나 도덕적 기반이 없이 쓰일 경우에는 화자(話者)인 동물이 필자가 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우회적으로 쉽게 쓸 수는 있지만 자신의 삶을 투영시키기에 역부족인 사람이 써서는 설득력을 얻기 힘들다는 의미다.
우화는 작가의 오롯한 삶에서 나오는 우회 문학
과거 이솝이 들려주었던 인간의 도덕 재무장, 라퐁텐의 군주제 비판 등 우화는 여러 가지 교훈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모라비아가 이 책을 통해 들려주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주제파악 하면서 사는 인간이 아름답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같은 기린 무리에 있으면서도 자기가 기린일 줄도,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자신이 너무 작다며 푸념하는 기린. 그 모습에서 아집으로 똘똘 뭉쳐 공동체와 융화하지 못하는 불쌍한 인간군상이 오버랩 되는 것을 모라비아도 경험했을 것이고 이제는 그것을 우리에게 묻고 있다. 혹시 당신도 그렇게 사냐고.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축선으로 따라오는 단어가 하나 있다. 바로 '창조주'다. 선사시대 사랑 이전부터 존재했고 현재와 미래까지도 무한히 영속하는 창조주의 손바닥에서 인간의 탄생과 소멸을 거듭한다. 우화도 마찬가지다.
모라비아는 생의 마감이 끝날 무렵 우화를 통해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신에 대한 경외심을 이 책에 담았다. 서툴게 인간 세계를 비판하기보다 창조주의 산물인 인간을 사랑하는 게 우선이란 것을 다시금 깨우치게 하는 책이다. 모라비아의 이 작품은 1994년 '동화의 노벨상'인 안데르센 동화상을 수상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 알베르토 모라비아(Alberto Moravia, 1907~1990)
옮긴이 : 이현경(이탈리아어 전공, 이탈리아 대사관 주최 제1회 번역문학상 수상)
펴낸곳 : 열림원
펴낸날 : 2006. 3. 13
쪽 수 : 278쪽
책 값 : 1만1천원
선사시대 사랑이야기
알베르토 모라비아 지음, 이현경 옮김,
열림원, 2006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