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농사는 부모가 아니라 자식에게 달려 있을 뿐이다.
부모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자식 교육이다. 왜 그럴까? 이유는 하나다. 자식을 독립된 개체로 인정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자식을 자신의 소유로 생각해서 자신의 틀 속으로 자식의 삶을 끌어들이면 안 된다.
유독 우리나라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다른 어떤 나라보다 더 극심한 현상 중에 하나가 자식 농사에 부모가 깊이 개입한다는 점이다.
손 붙잡고 시작한 학교 생활이 성인이 되어 대학 졸업할 때까지 손 붙잡고 다니는 것으로 끝난다. 물론 그것만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자식 결혼 이후까지도 지속되는 것이 보통이다.
요즘 들은 바로는 대학 교수에게까지도 ‘우리 애가 강의에 빠졌는데, 리포트가 뭐냐’고 물어 보기도 하고, 이번 학기 수강 과목에서 C를 받은 이유를 따져 묻는 학부모도 있단다.
군대에 가려고 하는 데 휴학을 어떻게 하느냐고 해서 이러저러해야 한다고 교직원이 답변해주자, 부모가 잘못 알아들어서 당사자가 있다면, 직접 말하겠다고 학생을 봐꿔달라는 교직원의 말에 부모는 아니라고 자신이 직접 처리해야 한다고 박박 우겨대는 경우도 있단다.
이쯤이면 부모가 자식을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이 부모를 훈련시키는 꼴이다. 부모가 자식의 노예로 사는 꼴이다. 실상 아이들이 부모 품에서 자라나 커가면서 제 스스로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모든 일을 이런 식으로 처리해 왔으니, 스스로 뭔 일을 마무리 할 수 있겠는가?
일류 대학 다닌다는 학생도 예외가 아니다. 더 하면 더 했지 덜하지 않다. 숙제도 제 홀로 해 본 적이 없으며, 과외 선생에게 배운 것으로 성적을 받아 왔으니, 리포트 하나 제대로 작성할 수 있겠는가? 일류 대학 다닌다고 '인간'이 일류라고 생각하면 큰 코 다친다. 이 아이들은 상당한 질병을 앓고 있는 수준으로 보면 된다.
하버드, 예일 출신만이 우리의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가?
미국 예일대 법대학장 고홍주 박사의 어머니 전혜성이란 분이 <섬기는 부모가 자녀를 큰 사람으로 키운다>는 책을 냈다고 해서, 우리 신문들이 요란하다. 이런 문제로 요란떨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분은 자식들을 잘 교육한 분으로 유명하단다. '잘 교육했다'는 기준이 무엇일까? 알고 봤더니, 잘 교육했다는 것이 “자녀 6명을 모두 예일대와 하버드대에 보냈고 가족이 총 11개의 박사학위”가졌다는 것이다.
자신도 사회학과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예일대 교수를 지냈다고 한다. 일류대학에 보내고 박사학위를 받으면 자식 교육 잘 시킨 것일까? 결과를 중시하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그럴 것이다. 그래서 우린 이런 분을 두고 자식 농사 잘 지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단언하건대 단 한번도 아이를 위해 나 자신을 희생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부모가 인생의 한 기간을 온전히 아이를 위해 희생하는 모습은 오히려 아이에게 독이 된다”고 했다고 한다.
이 말을 뒤집으면, 자식을 위해 헌신했다는 말도 성립한다. 모든 식구들이 모조리 왜 일류대학에만 들어갔을까?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은 왜 없었을까? 혹시 식구 중에 일류대학에 들어가지 않으면 가족으로부터 왕따를 당할 수도 있다는 스트레스는 받지 않았을까?
미국이란 나라가 대학을 나온 사람을 반드시 요구하는 사회일까? 건전한 미국 시민이라면 이분을 그렇게 우리만큼 부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보통 사람에겐 대학교수란 직업조차 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이건 어거지식 '한국적 평가식' 교육관에 따른 생각일 뿐이다. 하버드를 수석 졸업했다고 책 팔아먹은 사람을 보고 한참 웃었던 기억이 있다. 대학에서 수석이란 것도 웃기지만, 대학 학점이란 게 그 사람의 한 인격을 온전히 평가하지 못한다. 대학 성적은 그저 한 교수의 주객관적 평가일 수밖에 없다.
자녀에게 ‘뚜렷한 목적과 열정’을 가르쳐서,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걸 하겠다는 생의 목적이 생기면 공부하지 말라고 해도 자녀 스스로 공부한다’는 것이다. 좋은 충고다.
그러나 목숨을 받쳐 공부하겠다는 발상은 불온하다. 공부는 목숨 받쳐 할 일이 아니다. 그게 종교와 같이 인생의 도를 닦는 일이라도 되는가? 공자의 말처럼 아직도 '아침에 도를 이루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시대일까? 공부(쿵푸)라는 것은 예전엔 한가(스콜레)한 사람들만이 하던 일이다. ‘쿵푸’라는 말에도 여유와 한가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지금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지만, 한 인간으로 살아나가기 위해서 할 뿐이다. 공부 잘 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내고, 자신의 특기를 살리면서 이 세상을 잘 살아가는 것이 공부의 본질이 된 시대이다. 대학교수, 박사가 교육의 목적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성공의 판단도 남이 해주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만족을 얻으면 되는 것이다. 그 뿐이다. 무엇을 더 바라는가?
현재 하버드대 공공보건대학원 부학장인 큰 아들 고경주씨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다. "경주가 예일대 1학년이던 1970년 인종차별 반대 데모가 벌어졌는데 경주는 거길 다 쫓아다닌 끝에 ‘대안 없는 토론은 의미 없다’면서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어요. 의사가 된 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던 예방의학, 보건후생을 공부하더니 매사추세츠 주 보건후생부 장관이 되고 하버드대 공공보건대학원 부학장이 됐습니다.”
큰자식이 속된 말로는 출세했다. 편안하게 먹고 살 만하다는 뜻이다. 인종 차별 데모에서 토론하는 게 대안 없는 것이 돼놔서 그만 두었다. 그래서 그것이 왜 의사가 되도록 이끌었을까? 이해할 수 없다. 생의 진정한 목적을 그 쪽에서 진작에 찾은 사람이라면, 그 사회에서 인종 차별을 철폐하는 일에 일생을 바쳤을 것이다.
주류 사회에 편입해 유색인이 편안하게 사는 길은 의사, 변호사와 같은 페이퍼 워크하는 일에 종사하면서 노후를 보내는 일이다. 미국에 한국 출신 의사들 편하게 잘 산다. 백인 동네에서 대우받고 산다. 자기들끼리 모이면 외롭다고 주역을 펴 놓고 읽으며, 한자 공부하는 친구들도 보았다. 자식들은 그 쪽의 삶의 방식대로 부모 곁을 다 떠났으니 말이다.
생의 목적을 그렇게 단순하게 보는 사람에게는, 특히 일류만을 꿈꾸는 이 땅의 강남의 어머니들에겐 그 분의 충고가 멋있어 보일 것이다. 어쩌면 그들을 위해, 또 그와 같은 부질없는 희망이라도 가져보기를 꿈꾸는 사람들을 위해 출판사가 그런 책을 기획했을 것이다.
보통의 부모들을 기죽게 하고, 공부에 일생을 매달리지 않는 사람을 움추려 들게 하는 저 따위 책들이 넘치는 사회는 건강하지 않은 사회이다.
하루하루 살기 위해 자신의 아들과 힘든 나날을 견디는 사람에게 아무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책이다. 그걸 선전해 주는 한국의 언론이 안타까울 뿐이다. 무엇이 되든 안 되든 관계 없이 한 인간으로서 떳떳하고 정직하게 살아나가는 시민으로 살겠다는 것이, 오히려 더 분명한 인생의 목적이 아닌가? 이런 사람이 많아야 사회가 밝아지는 것이 아닌가? 의사가 많다고 해서, 변호사가 많다고 해서 우리 사회가 건강해 질까?
△뚜렷한 목적과 열정을 심어줘라 △맡은 바 책임을 충분히 다할 때 자기완성도 이룬다 △일생에 걸쳐 정체성을 재정립시켜라 △덕이 재주를 앞서야 한다 △창의적 통합력이 아이를 살린다 △역사적이고 세계적인 안목과 시야를 길러라 △진실한 마음을 얻는 대인관계의 힘을 경험하게 하라
이런 얘기들은 식상할 정도로 들은 바 있는 시시한 언사들이다. 그 분이 아니더라도 평범한 어머니라도 다 해줄 수 있는 말들이다. 보통의 어머님이 자식에게 가르치는 말들이다.
머리 속에 기억하는 능력은 타고나는 수가 많다. 노력으로 메꿀 수도 있다. 자연의 순리에 어울리면서 또 남과 더불어 인간답게 살아가라는 믿음을 보존하면서 스스로 선택한 길을 가도록 가르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이렇게 쌍지팡일 짚구 나서는 까닭은 잘난 사람들의 부모를 앞세우고, 일류대학을 앞세우고, 벼슬해 출세한 사람을 앞세우는 이 땅의 언론 풍토가 싫어서다. 이들 뒤에 그저 묵묵히 살아가는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더 아름답고, 더 절실히 우리가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란 것을 제대로 인식하라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대학교수’가 되기보다는 동네 빵집 주인이 되라'. 이건 하버드대학 못 보낸 우리 아버님의 교육적 충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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