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내 오기는 왜 습자지보다 얇단 말인가?

무관심한 남편, 미워해야 하건만... 기다려지는 것은 왜일까

등록 2006.04.27 14:59수정 2006.04.27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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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하는 일이 있다고!!!"


감기에 걸려 골골대는 마누라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위로 대신 날아온 남편의 불평 섞인 한마디였다.

"하는 일이 없으니까 감기에 걸리지…." 변명이라고 해 놓고 나니 아픔의 자유조차도 결혼과 동시에 결박당한 것 같아 비참함이 밀려왔다.

"근데…, 사람이 아파서 골골대는데 꼭 그렇게까지 말을 해야 돼! 나는 뭐 아프고 싶어서 아프나? 아픈 애들 곁에서 밤새 간호하다 보니 이렇게 된 걸 나보고 어쩌라고!"

평소에도 워낙 무뚝뚝한 성격의 남편인지라, 굳이 위로를 바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명색이 남편인데 빈말이라도 "곁에 있었으면 죽이라도 쒀 주었을 텐데…" 이런 말은 해줘도 누가 잡아간단 말인가.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데, 빚을 갚기는커녕 도리어 뻥튀기를 하며 '나'라는 사람을 그저 애들 키우고, 살림 늘리며, 집안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아프지도 말아야 하는 철인쯤으로 생각을 하고 있으니….


죽었다 깨어나도 남편이란 사람은 나에게만은 영원한 빚쟁이로 남을 것 같아 몰려오는 서운함에 소나기처럼 한바탕 쏘아 붙여줬다.

"이까짓 감기로 병원은 무슨 병원이냐"며 따듯한 물로 그저 타는 갈증을 잠재우고, 그저 참는 게 대수이려니 하며, 남편의 말마따나 가정의 평화와 안녕, 통장의 잔고만을 생각하며 미련을 떨었던 내 자신에게 화가 났다.


게다가 아무리 심한 감기도 고춧가루를 팍팍 넣은 콩나물국에 소주 한잔이면, 하루 저녁이면 툴툴 털고 일어나던 그 젊음이, 이젠 정말로 추억이라는 서글픈 수식어 안에 잠들어 버린 것 같아 더 화가 났다.

그 동안 난 무엇을 하며 나이를 먹었던가? 감기 하나도 못 이기는 부실한 몸과, 아픈 마누라 비위도 못 맞춰주는 돌부처 같은 남편, 그리고 엄마가 아프든지 말든지 시간마다 간식을 요구하는 두 아이들….

이런 현실을 알면서도 내 몸 하나 챙기지 못해 병원도 가지 않은 채 미련을 떨고 있는 나! 아줌마!

사람이 아프면 서러워진다고 했다던가? 아프기 전에도 나란 사람이 파릇파릇 쑥향이 나는 젊은이가 아닌 줄은 알았지만, 감기에도 맥을 못 추고 헤매는 것을 보니 이리도 서럽고 화가 날 수가 없다.

그런데 더 화가 난 것은 아무리 서운한 말을 던지고, 나를 세상없는 미련퉁이로 만들어도 지금 이 순간 남편이 곁에 있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곁에서 손이라도 잡아주면 감기가 좀더 빨리 나을 것 같고, 고춧가루를 뿌려놓은 듯 따끔거리는 콧구멍에 남편의 땀 냄새가 밴 체취가 들어간다면 왠지 숨쉬기가 한결 수월해질 것 같다는 것이다. 난 단지 이런 걸 기대를 했을 뿐인데….

"남편 없는 티를 내요! 기다려 내가 금세 가서 손도 잡아주고, 따듯하게 안아줄 테니까." 절대 무리한 욕심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8년을 같은 이불을 덮고 살았으면서 아직도 나를 남편이 몰라주는 것 같아 진짜로 섭섭하고, 서러웠다.

아이들을 챙겨 집을 나섰다. 무뚝뚝한 남편한테 더 이상 기대할 것도, 기댈 이유도 없어서였다. 병원을 찾아 헐 대로 헌 코를 치료받고, 엉덩이에 주사도 한방 맞았다. 그리고 약을 받아 집으로 오면서 "그래 내 몸은 내가 챙긴다!"는 오기가 생겼다.

약봉지들.
약봉지들.주경심
집에 오자마자 약을 먹여서 아이들을 눕혔다. 유치원도 못 간 아이는 금세 잠이 들었다. "내 새끼들, 니들도 이 엄마가 챙긴다!"

문자가 날아온 건 그때였다. "병원 갔다 왔어? 나도 없는데 아프면 어떡하냐?"

그런데 방금 전까지의 그 근본 없는 오기는 온데간데없이 내 등이 비빌 언덕은 오직 남편뿐이라는 비굴한 생각이 밀려오면서 난 이렇게 답장을 날리고야 말았다.

"언제 올 거야? 빨리 와요!! 여보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아! 내 오기는 왜 습자지보다 얇단 말인가? 왜 남편은 그 이름만으로도 나를 순한 양으로 만든단 말인가.

남편이 오기 전에 열심히 약을 먹어서 감기를 쫓아내야겠다. 그래야 내 남편에게 맛난 감자탕을 끓여줄 수 있을 테니까.

약봉지들.
약봉지들.주경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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