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앞 문구점의 모습송춘희
초등학교 문구점에 갈 때면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온 듯한 희열을 느낄 때가 있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아침마다 교문을 들어설 때면 꼭 생각나는 준비물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이 학교 앞 문구점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담임선생님께 불려가 혼나지 않아도 되는, 위기를 모면할 수 있는 유일한 방패막이였기 때문이다.
몇 십 년이 지나도 아직까지도 문구점의 한 귀퉁이를 지키고 있는 돼지 저금통이 활짝 웃으며 반긴다. 문안을 들어서면 더 기발하고 재미있는 물건이 많다. 지금 돈 오백 원, 천 원짜리 딱지, 카드, 구슬, 미니 선풍기에 이르기까지 아이들 눈에 이보다 더 멋진 보물 창고가 있을까 싶다. 어린 시절에는 기껏해야 2~3평 남짓한 가게 속에 저 많은 보물을 숨기고 사는 가게 주인이 한없이 부러운 때도 있었고 나도 크면 학교 앞 가게 주인이 되어야지. 하는 마음도 품었다.
어른이 되어 둘러보는 초등학교 문구점은 마치 옛 연인을 만나듯 반갑고도 쓸쓸하다. 어린 시절의 행복과 기쁨에 찬 마음으로 막상 그곳에 가보면 세파에 물들고 찌든 내 눈에 비친 물건들은 그다지 새로운 기쁨을 주지 못 한다. 내 마음은 그때의 어린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래된 연인을 우연히 마주쳤을 때에도 이 같은 마음이 아닐까 한다. 어른이 되어 생활의 씀씀이가 어린 시절보다 커지고 윤택해졌을망정 그 시절의 순수나 아름다운 기쁨을 무엇으로 되돌릴 수 있을까?
얼마 전 폴 빌라드의 소설 <이해의 선물>을 읽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자주 가던 사탕가게의 주인인 위그돈씨는 주인공이 버찌씨를 가져와 사탕과 바꾸려고 하자 거래라는 것을 모르는 그 순수한 아이에게 잔돈을 건네주며 너그러운 어른의 이해심으로 동심을 지켜준다. 자신이 자라 열대어 가게를 차리게 되었는데 어린 남매가 와서 자신의 어린 시절과 같은 행동을 한다.
주인공은 이내 어린 시절 자신에게 베풀었던 위그돈 아저씨를 생각 해내고 그 아이들에게도 같은 선의를 베푼다. 터무니없는 가격에 잔돈까지 주는 것을 보고 처음에 아내는 화를 냈지만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고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는 이야기다.
사회가 어렵고 경기는 나쁘고 장바구니 물가는 자꾸만 뛰지만 부자들은 날로 부자가 되어가고 거리의 노숙자는 해마다 늘어만 간다. 가끔씩 넉넉한 형편을 오로지 화려한 몸치장이나 외모에만 열심인 사람들을 볼 테면 마음이 우울해진다.
물론 나도 더 많은 여유가 있는 생활을 원하며 또 내게 그런 부유함이 찾아온다면 회피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물질적 부가 늘어감에 따라 지적, 도덕적 부유함도 함께 늘어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난해지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신적인 부유함이 불어나지 않는 행복이 과연 얼마나 가치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의 나는 여유가 많지는 않아도 문구점의 물건은 쉽게 살 수 있으니 물건을 사는 것은 그저 구입에 불과할 뿐 어린 시절의 승리의 기쁨은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