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총리님, 어머니는 전쟁을 원치 않습니다

[편지] 당신의 어머니같은 평택 할머니들의 소원을 들어주세요

등록 2006.05.03 14:11수정 2006.05.03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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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파가 끝난 논이 가뭄으로 말라가자 논에 물을 대고 있는 황새울 들녘. 그 너머 평택미군기지가 보인다. ⓒ 최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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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을 패기 시작한 보리밭, 밟을수록 더 푸르게 살아나는 보리의 생명력처럼 펄럭이고 있는 '평택에 평화를' 깃발 ⓒ 최종수

벚꽃이 지고 흰나비 떼를 풀어놓은 듯 배꽃이 한창입니다. 희망의 봄입니다. 우리 사회도 봄처럼 희망이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일벌들이 바빠지는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정당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최종수 신부입니다.

무릇 대통령의 역할이 아버지라면, 총리의 역할은 어머니라고들 합니다. 어려운 국정을 이끌어 가시느라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시대의 양심을 지키고자 하셨던 지난 삶처럼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는 국정을 운영하신다면 좋은 결과들이 있을 줄 압니다.

한나라당의 사상검증까지 받으실 만큼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애써 오신 총리님의 삶에 깊은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숱한 고문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민주와 통일의 길을 걸어오신 삶의 자취, 그래서 최초의 여성총리가 될 수 있었다고 모두들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동안 의로운 삶을 지켜온 분이 너무 힘든 자리를 자처하지 않았나 하는 걱정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지켜오신 양심적인 삶이 있기에, 춥고 그늘진 서민들을 더 따뜻하게 품어주시고 아직도 뿌리 내리지 못한 민주와 우리 민족의 통일을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힘차게 내딛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어머니는 전쟁을 원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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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대만의 독립선언과 함께 중국과 미국의 전쟁 예상도. ⓒ 자주적 민주정부

한 총리님께서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재배치되는 평택미군기지는 '전략적 유연성'을 확보하기 위한 기지입니다. 기지건설비용이 10조, 이전비용이 6조에다 설계변경에 따라 또 얼마의 예산이 더 추가될지 모릅니다.

16~20조로 예상되는 천문학적인 미군기지건설비와 주둔비를 생각할 때면 학교 급식비를 내지 못하는 아이들, 보일러 기름이 떨어져 얼음장같은 단칸방에 홀로 사시는 노인들, 실직한 가정들이 떠오릅니다.

어머니는 전쟁을 원하지 않습니다. 또한 내 조국을 지키는 일도 아닌, 미국의 국익을 위한 전쟁에 자식을 파견하는 어머니는 없습니다.

오는 2008년에 대만의 독립선언이 예상되고 있습니다. 만약 미국과 중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전략적 유연성'에 의해 한국군이 파병되어야만 합니다. 앞으로 100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미군기지를 평택에 건설하게 된다면, 우리 손자의 손자들까지 미국이 일으키는 전쟁에 파병되어야 합니다.

미국은 우리의 우방이 아닙니다. 가까운 역사를 보더라도, 일본이 조선을, 미국은 필리핀을 식민지로 만드는 카스라테프트 밀약에서 이미 드러났습니다. 적어도 미국이 우방이라면, 한국정부에 미군기지와 FTA를 그렇게 일방적으로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지난주 월요일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주최로 '평택 그리고 한반도의 생명과 평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미사 후 미국에서 선교사로 파견된 신부와 담소를 나누었는데, 미국 사람이 한국 사람보다 한국을 더 사랑하는 고백을 들으면서 마음 한켠이 뿌듯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그 분의 말씀을 조금 전해드리겠습니다.

한국사람이 된 미국인의 고백 "평택은 한·미 관계가 만든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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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리 성당에서 '평택 그리고 한반도의 생명과 평화를 위한 미사'를 드리고 있는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신부와 신자들. ⓒ 최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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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미사를 드리고 있는 메리놀 수도회 하유설 신부. 그는 여성신학을 전공한 신학자이기도 하다. ⓒ 최종수

"스물세살 때(1969년) 평화봉사단으로 와서 1975년까지 한국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미국보다 한국에서 더 많이 산 셈이지요. 70년대 한국은 미국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고 누추한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소박한 정과 순수한 눈빛의 삶은 저를 변화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왜 인도에서 사시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80년 미국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내 인생의 학교이자 제2의 고향인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미국 사람으로서, 미국의 패권주의를 반대합니다. 왜 군대가 필요하고, 더욱이 남의 나라에 미군을 주둔시켜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미국 군대는 자기방어를 하기 위한 군대가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군대입니다.

이 곳 평택 미군기지도 전쟁을 준비하는 곳이고 전쟁을 시작하는 장소입니다. 이렇게 평화로운 생명의 땅을 빼앗아 사람을 죽이는 군대를 주둔시켜서는 안 됩니다. 더욱이 미국은 기독교 국가입니다. 미국인들이 믿는 하느님은 전쟁의 하느님이 아니잖습니까?

저도 처음엔 문화와 전통의 차이에서 오는 편견과 사고에 소스라치게 놀란 때도 있었습니다. 백인우월주의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때 나와 한국인과의 관계는 '나'와 '그들'의 관계였습니다. 그리고 1980년에 사제서품을 받고 한국에 다시 왔을 때는 '나'와 '당신'의 관계였습니다. 90년대에 이르러서야 '나'와 '나', 평등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미국 사람인 내가 한국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미국정부가 한국정부를 대하는 태도가 '나'와 '그들'의 관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평택은 이같은 미국과 한국과의 관계가 만들어낸 상처이고 고통입니다. 그런데 한국 정부의 입장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한국정부가 한국 국민을 대하는 태도도 미국과 한국과의 관계처럼 '나'와 '그들'의 관계입니다. 너무도 슬픈 일입니다."


성당 앞에 조성된 평화공원에서 미국 신부님의 고백을 듣고 있는데 대나무를 엮어만든 설치 조형물 파랑새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새 한 마리를 두 손으로 받들고 서 있는 사람. 500년 전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라는 평화의 기도로 잘 알려진 프란치스코 성인이 떠올랐습니다.

벌써 대추분교에는 군병력이 투입된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화로 풀자는 정부의 의지는 무엇입니까?

대화를 하자면서 범대위 상임대표와 간부들, 주민대책위원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해놓고 있습니다. 주민들이 원하는 기지이전 반대에 대한 의견은 그 누구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정부도 국방부도 주민들의 보상비만 대안책으로 제시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명분으로도 군이 투입되어서는 안 됩니다. 대추리는 아직 군사기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분노처럼 타오르는 볏짚, 그 위로 국방부 헬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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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꼬를 트기 위해 미군기지 결사반대 구호가 선명한 깃발의 장대로 쑤시고 있는 최수동 할머니. 더 긴 장대를 구하기 위해 마을로 가는 할머니의 길이 멀게만 느껴진다. ⓒ 최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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볏짚이 주민들의 분노처럼 타오르고 있는 들판에서 볏짚을 줍고 있는 자원봉사자들과 직파기에 볍씨와 비료를 준비하는 풍경 뒤로 미군기지의 레이더탑이 눈에 들어온다. ⓒ 최종수

어수선한 가운데도 대추리 농민들은 농사지을 준비로 한창입니다.

자전거를 타고 들로 나갔더니 한 할머니가 막힌 수로를 뚫고 계셨습니다. 흰머리처럼 허옇게 말라가는 직파를 끝낸 논에 물꼬를 대고 있었습니다. 더 긴 장대가 필요하다며 총총히 걸어가셨습니다. 반달처럼 굽은 허리 곁에서 '미군기지 결사반대' 노란 깃발이 할머니 눈물처럼 펄럭이더군요. 마을을 향해 일직선으로 나있는 논둑길에서 전 그만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할머니의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다시 페달을 밟아 황새울 들녘을 달렸습니다. 자전거가 멈춘 곳은 두 대의 트랙터가 직파를 하는 논이었습니다. 겨우내 추운 논을 덮어주었던 볏짚들이 주민들의 분노처럼 불타오르고, 그 연기가 솟아오르는 하늘에는 국방부의 헬기가 맴돌며 감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자기 논에 볍씨를 뿌리고 있는 농부들을 누가 감시할 수 있는지. 하늘에 금을 긋고 자기 하늘이라 억지를 쓰고 있다는 생각이 뇌리를 맴돌았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어 트랙터도 볍씨와 비료를 실은 트럭도 오토바이도 그 자리를 잠시 떠났습니다. 다시 논길을 달리는데 조금 전에 보았던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작업을 마친 할머니가 반달처럼 환하게 웃으십니다. 할머니는 긴 PVC 파이프를 들고, 전 자전거를 끌고 할머니와 손자처럼 논둑길을 걸었습니다. 할머니는 묻지도 않았는데 체한 것을 토해내듯 가슴속에 피멍이 든 한을 쏟아내셨습니다.

"고상 숱하게 혔어. 7남매 낳아서 아들 셋, 딸 하나 대추리 땅에 묻었어. 6·25 전에 셋을 잃었어. 한국전쟁 중에 미군에게 쫓겨나서 천막 치고 볏짚 깔고 살 때 아들 하나 또 땅에 묻었제. 생각만 해도 끔찍혀. 왜놈들에게 쫓겨난 것도 억울한데 미군들까지 우릴 쫓아내고…. 우리 남편은 중병으로 반송장이었어. 여자 혼자 흙집을 부셔가지고 지게에 지어 날랐어. 저기 작은 언덕 같은 곳에 천막을 치고 살았어.

다들 집도 못 짓고 벼야 콩이야, 배추야 무야, 겨울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어. 밤에도 쉴 시간이 없었어. 동짓달에 집을 겨우 지었어. 장사도 안해본 장사가 없어. 아들딸, 손자들 갈치고 안 사 입고 애끼고 애껴서 땅을 샀제.

이제 살만헌 게 미군들이 또 지랄을 허잖여. 난 못 나가. 자식 넷을 이 땅에 묻었는디, 어떻게 나간단 말여."


군대와 무기로 평화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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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리 성당 십자가가 내려다보는 마을회관 골목에서 쪽파를 다듬고 있는 할머니들과 점심먹은 그릇을 닦고 있는 할머니들. ⓒ 최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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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이 곧 무너질 것 같은 소박한 집에서 살고 있는 할머니, 긴 파이프를 들고 미사일 설치조형물 앞을 지나치고 있는 마을의 배경이 미군기지이다. ⓒ 최종수

어찌 이 할머니만 겪어온 삶의 역정이겠습니까. 이곳 대추리에 살고 계시는 분들은 하나같이 말씀을 하십니다. 태어난 이 곳에서 얼마 남지 않은 여생 지내다 조용히 묻히고 싶다고. 그러나 지금 그 분들은 너무 가혹한 형벌을 받고 있습니다. 지은 죄도 없이 받고 있는 것입니다. 열심히 살아온 죄밖에 없는데도 하루하루가 눈물바람입니다.

'우방'과 '안보'라는 이름으로 두 번씩 쫓겨났던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탈을 쓰고 어찌 세 번씩이나 그와 같은 고통을 전가할 수 있단 말입니까? 지난주에 법원 집행관과 국방부 직원이 대추분교에 예고없이 들이닥쳤을 때, 넋이 나간 표정으로 안절부절 하시는 할머니들을 지켜본 일이 있습니다. 눈만 뜨면 일터로 나갔던 그분들한테 법원 집행관들은 숨죽이는 공포나 다름없었습니다.

한명숙 총리님, 주민들과 대화의 시간은 충분합니다. 공동선은 평화적인 방법으로만 이룰 수 있습니다. 자주와 통일에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는 미군 재배치를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미군 없이도 한반도의 평화를 보장할 수 있는 스위스 같은 '영세중립국'의 대안도 하나의 좋은 방안이겠지요.

군대와 무기로 평화를 보장받을 수는 없습니다. 미국 전역에서 수십만명이 이라크 전쟁반대와 종식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전쟁과 폭력은 또다른 전쟁과 폭력을 확대재생산할 뿐입니다. 경찰과 군대의 무력으로 집과 땅을 강제로 빼앗아서는 안됩니다. 총리실에서 내리는 결정이 민주주의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는 자충수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두 손 모읍니다.

2006년 5월 2일 늦은 밤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최종수 신부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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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일 오후 12시경에 파랑새 평화공원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신부들이 '평택 미군기지 확장저지! 한반도 전쟁반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최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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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 기자는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일꾼으로, 불평등한 소파개정 국민행동 공동집행위원장으로 2000년 6월 20일 폭격중인 매향리 농섬에 태극기를 휘날린 투사 신부, 현재 전주 팔복동성당 주임신부로 사목하고 있습니다. '첫눈 같은 당신'(빛두레) 시사 수필집을 출간했고, 최근 첫 시집 '지독한 갈증'(문학과경계사)을 출간했습니다. 홈피 http://www.sarang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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