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세를 부르면 저승사자가 달려온다

농민군 진압하려다 청나라 부른 고종, 결국 일본 때문에 망해

등록 2006.05.06 18:45수정 2006.05.06 18:46
0
원고료로 응원
대통령이 되기 전에 한 번도 미국을 방문한 적이 없다 하여 미국의 우려를 샀던 노무현 대통령이 이제는 그런 미국의 우려를 말끔히 씻어내고 있다. 지금은 노무현 대통령이 그 누구보다도 더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대통령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동북아 균형자'의 '저울'은 이미 미국으로 기울고 있다.

지금 노무현 대통령이 평택에 군·경을 파견한 목적은 대한민국의 이익을 위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노무현 정권의 이익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 민족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미국의 세계패권 전략을 돕기 위한 것일 뿐이다.

그렇다고 미국이 노무현 정권을 확실히 지켜줄 수 있는 존재라고도 볼 수 없다. 한국에서 미국과 '궁합'이 맞는 사람들은 노무현 정권이 아니라 수구 기득권세력들일 뿐이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을 만든 사람들은, 지금 미국을 반대하는 서민 계층이다.

미국에 대한 허망한 '짝사랑'

따라서 지금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지지계층을 적으로 돌리는 동시에, 자신을 도울 리 없는 미국에게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노무현 대통령은 지금 허망한 '짝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의 앞날을 가늠하게 하는 대목이라 아니할 수 없다.

허망한 외세에게 의존하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의 선택은 1894년 당시 고종을 그대로 연상케 하는 것이다. 그때 고종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조선은 물론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가 일본 제국주의의 어두운 그림자 안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었다.

1894년 1월 11일(음력, 아래도 마찬가지) 고부민란을 계기로 갑오농민전쟁(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다. 전봉준 영도 하의 농민군은 3월 29일 태인 관아를 접수하고 4월 6·7일에는 황토현 전투에서 전주 감영부대와 보부상부대의 연합군을 대파했다. 농민군은 마침내 4월 27일 전주성을 함락하였다. 이제 대세는 농민군에게 기울고 있었다. 조선 민중의 선택은 반외세·반봉건이었다.


고종, 농민군 진압 위해 청나라에 파병 요청

반외세·반봉건이라는 도도한 물결 앞에서 고종은 어떤 선택을 하였는가? 그는 사임을 하였는가? 그의 선택은 외세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이었다.


전주성 함락 3일 뒤인 4월 30일에 조선정부는 청나라에게 파병을 공식적으로 요청하였다. 고종은 외세의 힘을 빌려 자국 백성을 진압하려 했던 것이다.

그럼, 이때 청나라 정부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조선이 위험에 처했으니, 조선을 도우러 가자"라고 했을까? <청광서조 중일교섭사료>라는 중국측 사료에 의하면, 당시 청나라 내부에서는 다음과 같은 반응이 나왔다. 이 책은 청나라 광서제(재위 1874~1908년) 당시의 중일관계에 관한 사료를 담은 책이다.

"마침 잘 되었다. 차제에 병권을 장악하고 조선 내정에 깊이 간여하는 것이 장래에 이롭다. 일본도 파병할 것이니, 일본과의 무력대결에 대비해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이 사료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청나라는 조선을 도우려 한 게 아니라, 아예 이번 기회에 조선을 확실히 장악하자는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5월 2일 북양대신 이홍장의 명령에 따라 청나라 해군이 인천에 상륙하였다.

조선정부는 애초 청나라 군대의 힘을 빌려 농민군을 진압하려 했지만, 상황은 조선정부의 의도와는 전혀 딴판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조선정부는 청나라가 농민군을 진압해 주기를 원했지만, 농민군을 진압할 군대는 따로 있었다. 일본군도 개입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 역시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출병을 결정했다. 일본은 이미 4월 29일의 내각 회의에서 출병을 결정하였다. 조선정부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기 1일 전에 이미 일본은 자체적으로 조선 출병을 결정해 두었던 것이다.

고종은 청나라만 불렀지만 일본까지 덩달아 개입

일본은 청나라가 출병하면 자국도 개입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종은 청나라의 파병을 요청했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일본의 파병을 요청한 셈이 되었던 것이다.

5월 6일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하자, 조선정부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 농민군도 정부와 타협을 보고, 5월 8일 전주성을 비워 주게 되었다. 농민군도 외세의 개입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농민군이 전주성을 비워 주었으니, 일본군의 출병 명분도 사라진 셈이었다. 그래서 5월 11일 조선정부는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일본군의 기세를 잠재울 수 없었다. 이미 1880년대부터 해군력을 강화한 일본이었다. 기세등등한 일본군 앞에서 청나라도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애초 청나라는 일본군의 개입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막상 두 눈으로 목격한 일본 해군은 청나라가 대적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조선과 청나라의 기를 꺾은 일본은 그 기세를 몰아 청일전쟁을 도발했다. 6월 23일 풍도해전을 시작으로 청나라 군대에게 공격을 개시한 일본은 8월 18일 압록강 전투를 계기로 사실상 승세를 잡게 되었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중국의 정예 북양함대를 꺾고 요동반도와 산동반도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한편, 청나라의 패색이 짙어진 9월 하순부터 농민군이 다시 봉기했지만, 12월 이후에는 일본군에게 완전 진압되고 말았다.

이렇게 조선 민중세력과 청나라 군대를 모두 제압한 일본은 이를 계기로 조선은 물론 중국에 대한 본격 침탈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일본은 그 여세를 몰아 러시아까지 제압(1905년)함으로써 조선과 만주에서 패권자가 될 수 있었다.

고종이 불러들인 것은 '저승사자'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를 불러들였던 조선정부의 선택 때문에, 일본군이 뜻하지 않게 개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정부와 농민군이 일본군의 개입을 저지하려 했지만, 결국에는 그 일본군 때문에 조선은 물론 만주까지 일본의 수중에 장악되고 말았다. 정권의 안보를 위해 외세를 불러들인 고종은 결국 '저승사자'를 불러들인 것이다.

지금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의 선택을 저버리고 외세와 손을 잡았다. 그러나 그 외세는 노무현 정부를 끝까지 돕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외세는 평택 기지를 발판으로 한반도와 동북아에 대한 패권을 강화하려 할 것이다.

그 와중에 우리 민족은 더욱 더 미국의 착취와 압박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일본은 미·일 동맹에 편승하여 동북아에서의 위상을 한층 더 강화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노무현 대통령은 메시아를 불러들인 게 아니라, 미국과 일본이라는 저승사자를 불러들이고 있는 것이다. 반미·반일 열기 때문에 다 죽어가던 저승사자가 노무현 대통령의 선택 때문에 다시 살아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뉴스 615>에도 실리는 글임을 밝힙니다.

덧붙이는 글 <뉴스 615>에도 실리는 글임을 밝힙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AD

AD

AD

인기기사

  1. 1 '징역1년·집유2년' 이재명 "이것도 현대사의 한 장면 될 것" '징역1년·집유2년' 이재명 "이것도 현대사의 한 장면 될 것"
  2. 2 수능 도시락으로 미역국 싸 준 엄마입니다 수능 도시락으로 미역국 싸 준 엄마입니다
  3. 3 의사 아빠가 죽은 딸의 심장에 집착하는 진짜 이유 의사 아빠가 죽은 딸의 심장에 집착하는 진짜 이유
  4. 4 "나는 폐허 속을 부끄럽게 살고 있다" 경희대 시국선언문 화제 "나는 폐허 속을 부끄럽게 살고 있다" 경희대 시국선언문 화제
  5. 5 미국에 투자한 한국기업들 큰일 났다... 윤 정부, 또 망칠 건가 미국에 투자한 한국기업들 큰일 났다... 윤 정부, 또 망칠 건가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