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사를 비롯한 관아건물과 주변의 모습들을 추측해볼 수 있는 해남읍성정윤섭
정호장이 살았던 곳은 해리(海里)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다 해(海)자가 들어가는 마을인 것을 보면 바다와 인접했던 곳임을 알 수 있는데, 지금은 간척사업에 의해 바다와 멀어졌지만 옛 지도를 보면 해남현치소 바로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던 것을 알 수 있다.
한양(서울)도 서해바다에서 시작된 긴 수로가 내륙으로 길게 연결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듯이 바다 길이 중요했던 옛날에는 육로와 바닷길을 연결하기 좋은 곳에 고을 터를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륙이 아닌 해안과 접하고 있는 고을을 치소를 정할 때는 거의 이러한 지리적(풍수적)여건을 고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해남은 이러한 전형적인 여건이 매우 잘 갖추어진 천혜의 지역임을 알 수 있다.
해남은 1437년(세종19) 해남의 진산(鎭山)인 금강산 아래에 현치소를 정하는데 북한의 명산인 금강산과 이름도 같지만 ‘옥녀탄금형’이라는 형국에 걸맞게 명당자리임을 알 수 있다. 이곳 금강산의 동쪽 금강곡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리는 물은 해남읍을 가로지르며 배산임수의 조건을 충족시킨다. 지금 보아도 금강산과 앞으로 펼쳐진 들판은 한 고을이 자리 잡기에 매우 길지임을 알 수 있다.
지금은 대전의 행정수도 개념처럼 외부의 침략을 막아내야 하는 군사적인 여건이나 다른 조건보다는 교통조건이 더 고려되는 것을 볼 때 옛날 도읍의 개념은 많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자연친화적인 조건을 고려한다면 오래전 이러한 풍수지리적 개념을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해남 정씨가 터를 잡은 해리지역은 해남 정씨와 통혼관계를 맺은 어초은 윤효정, '표해록'의 저자 금남 최부, 여흥민씨 입향조 민중건 등이 해남 정씨의 사위가 된다. 또한 금남 최부의 딸이 미암의 아버지인 유계린과 결혼을 하게 되는 등 당시 향족인 해남 정씨를 중심으로 통혼관계를 통해 지역의 유력한 재지사족(在地士族)으로 성장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살던 곳이 지금의 해리와는 행정구역의 범위가 다소 다르지만 해남군청을 뒤로 한 향교일대의 지역이 해리에 속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미암 유희춘이나 금남 최부 등이 해리에서 살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도 이 같은 범위를 생각하게 한다. '미암일기'를 보면 해남과 관련된 기록이 유독 많이 뛰는데 그가 해남에 살면서 맺은 이러한 인연과 관련이 깊다고 할 수 있다.
이곳은 진산인 금강산의 바로 산기슭 아래로 향교를 비롯하여 옛 건물들이 들어서 있어 전형적으로 읍성의 바깥쪽 뒤편에 자리하는 향족(사족·양반)들의 주거 공간 여건을 고려할 때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치소가 정해진 후 정호장이 해리를 중심으로 터를 잡고 살았다는 기록이 '해남윤씨문헌' 권지일(卷之一), 어초은공 편에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