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그는 가믄 안 되야, 철책선이 있디야"

40년 전 우리 마을 '삼팔선'의 기억... 지금도 대추리에서는 3류 소설이

등록 2006.05.09 15:37수정 2006.05.10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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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7일 오후 미군기지 확장예정지인 경기도 평택 대추리 들판에 '군사시설보호구역'을 알리는 경고문이 꽃혀 있다.

7일 오후 미군기지 확장예정지인 경기도 평택 대추리 들판에 '군사시설보호구역'을 알리는 경고문이 꽃혀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a 9일 오후 평택 미군기지확장예정지에 군과 경찰 헬기가 쉴틈없이 날아다니며 감시활동을 펴고 있다.

9일 오후 평택 미군기지확장예정지에 군과 경찰 헬기가 쉴틈없이 날아다니며 감시활동을 펴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거기 가믄 간 빼먹는디야."


어린 시절 동네 형들이 그랬습니다. 거기, 식장산 꼭대기에 올라갔다가는 간을 빼먹힌다는 것이었습니다. 식장산은 대전에서 가장 높이 솟아 있는 산입니다. 머리통 굵어서 알게 된 것인데 거기에는 미군부대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고층 아파트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그 시절 우리 집 마루에 걸터앉아 있으면 식장산이 눈 앞에 훤히 보였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기 싫다고 칭얼거리면 엄니는 식장산 쪽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해가 중천에 떴네, 해가 중천에 떴어, 아적까지 세수도 안 허구 뭐 허구 있는겨."

엄니의 성화가 시작될 무렵이면 식장산 꼭대기로부터 해가 한 뼘 이상 떠올라 있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매일 아침마다 식장산을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고것도 몰랐냐? 거기가 삼팔선이여"

'국민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인 어느 날, 동네 형들 중에 누군가 그랬습니다. 그 당시의 대화 내용을 정확히 기억할 수 없지만 대충 이랬습니다.


"저기 식장산에 올라갔다가 간 빼먹힌 아줌마가 있디야."
"문딩이들이 그런겨?"
"아니 코쟁이들이랴. 홀딱 벗겨놓고 간 빼먹는댜."
"에이 공갈이지, 코쟁이들이 사람 간을 워치케 빼먹냐?"


그러면 옆에 있던 또 다른 누군가가 진지하게 덧붙였습니다.


"울 아부지가 그러는디. 약초캐러 식장산 꼭대기에 올라갔다가 미국병사들한티 총맞어 죽은 사람두 있다는디. 철책선 넘었다구."
"식장산이 무슨 삼팔선여? 철책선이 있게."
"쬐끄만한 놈이 니가 뭘 안다구 까불어, 철책선이믄 철책선이지 가보지도 않구선."
"그람 성들은 가봤어?"
"자식아, 식장산 꼭대기루 잠자리비행기 왔다갔다 하는 거 못 본겨, 거기가 삼팔선여, 자식아, 넌 아적 고거두 몰랐냐?"


식장산이 삼팔선이라는 동네 형들의 말은 '쬐끄만한 놈'인 나를 놀리려구 한 소리였는데, 잠자리비행기(헬리콥터)가 요란스럽게 오고 가는 걸로 봐선 식장산 어딘가에 진짜로 '삼팔선 철책선'이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도무지 이해가질 않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를 괴뢰도당으로부터 구해줬다는 미군들이 어떻게 괴뢰군도 아닌 우리나라 사람들을 총으로 쏴죽이고 간까지 빼먹을 수 있을까? 가당치 않았습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얘기였지만 식장산을 바라보면 왠지 겁이 났습니다. 어쩌다 식장산을 올려다보면 간이라도 빼먹힐까봐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한동안 꿈속에서 코쟁이들이 혀를 날름거리며 나타나는, 가위눌림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식장산을 올려다보려 하지 않아도 식장산의 뾰족한 탑(미군기지 송신탑)은 내내 거기에서 우리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정작 우리나라에 사는 우리는 우리 마을을 내려다보지 못했지만 남의 나라에서 온 미군들은 늘 우리 마을을 내려 다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a 평택 미군기지확장예정지인 대추리 들판에 주둔하고 있는 군인들이 9일 오전 철조망 보강작업을 하고 있다.

평택 미군기지확장예정지인 대추리 들판에 주둔하고 있는 군인들이 9일 오전 철조망 보강작업을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괴뢰도당으로부터 우릴 구해준 미군이 왜?

식장산에 '삼팔선 철책선'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 것은 '국민학교'에 들어가서였습니다. 미국을 우리나라의 수호신처럼 얘기해줬던 선생님들로부터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약초인가 버섯인가는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아무튼 뭔가를 캐러 갔다가 식장산 철책 근처에서 미군병사들에게 총맞아 죽은 사람 얘기입니다. 그 얘기는 내가 머리통 굵어질 때까지 몇몇 사람들로부터 심심찮게 들었던 얘기였습니다.

당시 우리 동네 어른들 중에서 식장산 꼭대기까지 올라가 봤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린 우리들이 식장산 꼭대기에 서보는 것은 아예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식장산 꼭대기는 금단의 땅이며 그야말로 삼팔선을 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습니다.

식장산에 대한 또 하나의 기억이 있습니다. '국민학교' 고학년이 되어 갈수록 반공교육으로 단단히 중무장했던 우리들은 미군기지가 있던 식장산 철책을 얼씬거리면 그 사람은 분명 간첩일 것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식장산 근처에서 얼씬거리는 수상한 사람을 발견하면 횡재할 수 있다는 야무진 꿈도 꾸었습니다. 간첩신고를 하면 부자가 될 수도 있었으니까요.

당시 우리 마을 사람에는 우리 땅임에도 불구라고 왜 올라갈 수 없냐고 소리높여 항의 하는 '간 큰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미군들에 대해 반감을 가졌다가는 무조건 빨갱이로 몰려 목숨을 잃거나 평생 감옥살이를 하게 될지도 모르는 그 서슬퍼런 '박정희 시절'에 감히 누가 나설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소설같은 얘기입니다. 상식과 정의가 통하지 않는 미군과 우리의 관계를 놓고 보면 소설보다도 더 소설 같습니다. 40년 전, 우리 어린 시절에 있었던 일이었지만 이 땅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상식을 무시한 3류 소설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평택 대추리가 그렇습니다.

우리 땅을 미군에 헌납하겠다는 '간도 쓸개도 없는 인간들'

a 평택범대위 관계자들과 시민들이 8일 저녁 광화문에서 촛불 집회를 열고 평택 미군기지 이전 반대 집회 강경진압에 대해 국방부장관과 경찰청장의 사퇴를 촉구하고 있다.

평택범대위 관계자들과 시민들이 8일 저녁 광화문에서 촛불 집회를 열고 평택 미군기지 이전 반대 집회 강경진압에 대해 국방부장관과 경찰청장의 사퇴를 촉구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나는 여전히 어린 시절의 '간이 작은' 주인공이었습니다. 미군들이 기지를 세우려 하는 평택 대추리를 지키려다가 피투성이가 된 '간 큰 사람들'을 보다가 나는 문득 어린 시절 식장산 꼭대기에 두려움을 가졌던 그때처럼 여전히 간이 작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저 컴퓨터 앞에 앉아 사진 몇 장으로 분노만 삭이고 있었을 뿐, 스스로 이런저런 생업을 핑계로 '우리 땅 대추리'로 달려갈 용기가 나지 않았으니까요.

흔히 용기가 없는 사람들에 대해 '간이 작다'고 합니다. 밥술 좀 얻어먹겠다고 기생충처럼 권력에 빌붙어 사는 인간들을 두고 '간도 쓸개도 없는 인간들'이라고 합니다.

어린 시절 우리 동네 사람들은 미군의 총 앞에서 간이 작아졌을 망정 간을 빼놓고 다니지는 않았습니다. 쓸개마저 빼놓고 다니지는 않았습니다. 식장산 꼭대기를 출입 못하게 철책을 세워 놓았던 미군들을 결코 좋게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 땅에는 '간도 쓸개도 없는 인간들'이 설쳐대고 있습니다. 민족의 자존심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밥술 좀 얻어먹겠다고 자신들의 간이며 쓸개를 미국에게 다 꺼내 준 인간들입니다. 이들은 '정치'나 '언론'이라는 완장을 차고 자신들의 '간과 쓸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간과 쓸개'마저 빼앗아 미군들에게 헌납하겠고 선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미군들에게 우리 땅 대추리를 빼앗기지 않으려다가 피투성이 된 '민족 살리기 운동가'들을 '반미 운동가' 운운하고 있습니다. 대추리에서 피투성이가 된 이들이 '반미 운동가'라면 일제 시대 때에도 그러했듯이 그들은 간도 쓸개도 없는 '반민족 운동가'들인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반민족 운동가'들에 대해 분노를 가라앉히고 우리 아이들과 더불어 촛불을 들고자 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우리 아이들에게 '간을 빼앗기는 유년의 식장산'을 대물림해주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접근했다가는 총 맞아 죽는다는 소문이 나돌았던 '죽음의 식장산'이 아니라 '평화로운 식장산'을 물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언제 어느 때고 갈수 있는 '평화로운 대추리'를 되찾기 위해서입니다. 평화의 촛불로 '삼팔선'을 허물기 위한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대전의 동쪽에 자리 잡은 식장산은 판암동, 세천동, 산내동에 걸쳐 있는 해발 623m로 대전에서 가장 높은 산입니다. 내 고향 옥계동은 식장산과 마주보고 있습니다. 식장산에는 대전문화방송 송신소가 있습니다. 그 곳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던 임원찬씨의 증언에 따르면 식장산에서 50년대부터 줄곧 주둔해 있던 미군부대 막사는 지난 2005년에 중계기만 남기고 철거했다고 합니다. 요즘도 여전히 무인기지화시켜 놓은 중계기 주변으로 가끔씩 미군들이 나타나 훈련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대전의 동쪽에 자리 잡은 식장산은 판암동, 세천동, 산내동에 걸쳐 있는 해발 623m로 대전에서 가장 높은 산입니다. 내 고향 옥계동은 식장산과 마주보고 있습니다. 식장산에는 대전문화방송 송신소가 있습니다. 그 곳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던 임원찬씨의 증언에 따르면 식장산에서 50년대부터 줄곧 주둔해 있던 미군부대 막사는 지난 2005년에 중계기만 남기고 철거했다고 합니다. 요즘도 여전히 무인기지화시켜 놓은 중계기 주변으로 가끔씩 미군들이 나타나 훈련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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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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