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기지 않는 생명력, 시인 도종환의 힘

[서평] 도종환의 새 시집 <해인으로 가는 길>

등록 2006.05.17 15:19수정 2006.05.17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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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해인으로 가는 길>
책 <해인으로 가는 길>문학동네
세상에는 여러 부류의 작가가 있다. 혜성처럼 반짝 나타나 독특한 작품을 선보이고는 차기작이 실패하는 바람에 몰락하는 작가를 비롯하여 오랜 기간 그 생명력을 유지하는 이들까지 참으로 다양하다.

‘문학의 시대는 갔다’고 단언할 만큼 문학에 대한 관심과 흥미가 소원한 지금, 어수선한 문학 판에서 생명력 있게 작품을 선보이는 작가들을 보면 존경스럽기 그지없다.


시인 도종환이 바로 그런 작가가 아닌가 싶다.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면서 대중적인 인기를 확보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시인 중 하나이지 않은가.

그가 새 시집 <해인으로 가는 길>을 펴냈다. ‘해인(海印)’이란 불교에서 가장 큰 깨달음의 상징 중 하나를 뜻한다고 한다. 이 시집을 읽다 보면 그의 시가 왜 오래도록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이전의 것들보다 한층 더 성숙한 느낌이 드는 시들은 불교적 성찰과 깨달음을 향해 부단히 노력하는 자아의 모습을 보여 준다.

“화엄을 나섰으나 아직 해인에 이르지 못하였다/ 해인으로 가는 길에 물소리 좋아/ 숲 아랫길로 들었더니 나뭇잎 소리 바람 소리다/ (중략) 발을 담고 앉아 있었다/ 지난 몇 십 년 화엄의 마당에서 나무들과 함께/ 숲을 이루며 한 세월 벅차고 즐거웠으나/ 심신에 병이 들어 쫓기듯 해인을 찾아 간다/ 애초에 해인에서 출발하였으니/ 돌아가는 길이 낯설지는 않다” -시 <해인으로 가는 길> 중에서

인생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자신의 삶을 숲에 있는 나무에 빗대어 이야기한다. 그는 다른 나무들과 함께 나뭇잎 소리, 바람 소리에 취해 한 세상 화엄의 마당에서 지냈다고 전한다. 그리고는 "지난 몇 십 년 화엄의 마당에서 나무들과 함께 숲을 이루며 한 세월 벅차고 즐거웠다"고 고백한다.

나무가 나이테를 늘려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비바람과 눈보라에 시달리며 세월을 지탱하는가. 시의 화자는 이처럼 힘겨웠던 순간은 모두 잊은 채 자신이 살아온 한 세월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숲을 이루며 즐거웠다는 긍정적인 사고를 보여준다.


이 세상이 비록 긍정적이고 아름다웠을지라도 화자가 결국 추구하는 것은 바로 ‘해인’이라는 정신적 깨달음의 길이다. 인간이 애초에 해인에서 출발하였으니 해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고는 자아의 성찰을 통해 깨달음을 이루려는 불교적 ‘선(禪)’의 세계와 맞닿아 있다.

이 시집에 수록된 다른 시들 또한 이처럼 깨달음을 향한 시인의 강한 열망을 반영한다. 세월이 흐를수록 농익은 한 인간의 시적 세계는 아마도 불교적 절대 경지의 세계와 통하는가 보다. 시 <돈오의 꽃> 또한 불교적인 색채를 강하게 풍긴다.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비 오고 바람 분다// 연꽃 들고 미소짓지 말아라/ 연꽃 든 손 너머/ 허공을 보지 못하면/ 아직 무명이다// 버리고 죽어서/ 허공이 된 뒤에/ 큰 허공과 만나야/ 비로소 우주이다// 백 번 천 번 다시 죽어라/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매일 별똥이 지고/ 어둠 몰려올 것이다” -시 <돈오의 꽃> 전문

‘연꽃 든 손 너머 허공을 보지 못하면 아직 무명이다’는 단언은 이 세상에서 마음을 깨끗이 비우지 않으면 어찌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을 반영한다. 세상만사 다 허탈하고 허무한 것일진대 무엇 하러 그리 집착하며 살아야 하느냐는 시인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세상살이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것이 도종환의 시들이다. 버리고 비워야 함을 알면서도 그렇게 되기가 쉽지 않은 듯하다.

시 <무인도>는 무인도가 되어버린 섬처럼 자신의 마음의 집에 불이 꺼져 버렸다는 고백을 통해 홀로 있는 것에 대한 외로움을 말한다. 쓸쓸함을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세상살이에 깊은 애정이 있다는 뜻 아니겠는가.

시에 대한 애정이 식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시 <내 안의 시인> 또한 이 세상과 시를 사랑하는 도종환 시인의 순수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는 시인이 살고 있었다는데/ 그 시인 언제 나를 떠난 것일까/ 제비꽃만 보아도 걸음을 멈추고 쪼그려 앉아/ 어쩔 줄 몰라하며 손끝 살짝살짝 대보던/ 눈빛 여린 시인을 떠나보내고 나는 지금/ (중략) 손이 따뜻하던 착한 시인 외면하고/ 나는 어떤 이를 내 가슴 속에 데려다 놓은 것일까” -시 <내 안의 시인> 중에서

시를 쓰면 쓸수록 점점 더 성숙해지는 대신에 처음에 가지고 있던 해맑은 순수함을 잃어가는 자신에 대한 반성이 그대로 묻어난다. 그래서 그의 시는 사람의 마음을 이끄는 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솔직하게 자기의 이야기를 고백하기 때문이다.

도종환의 시가 꾸준히 인기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지금 현재 그가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들을 아주 소박하고 순수하게 이야기하는 시적 화자의 고백들. 그 목소리를 작은 옹기접시에 아무런 장식 없이 담아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예전 것들보다 한층 성숙했으나 한편으로는 순수함을 잃은 안타까움을 서글프게 노래하는 시들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든다. 시인이 자신의 목소리를 잃는 순간 그 시들은 생명력을 상실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아직까지 도종환의 시들은 생명력이 있게 느껴진다. 자기반성과 깨달음에 대한 갈구, 세상살이와 시 창작에 대한 고민이 그만의 목소리로 잘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해인으로 가는 길

도종환 지음,
문학동네,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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