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상처에 목례를 하다

[서평] 김수열 시집 <바람의 목례>를 읽고

등록 2006.05.19 16:05수정 2006.05.19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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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김수열 시집 <바람의 목례>

김수열 시집 <바람의 목례> ⓒ 애지

김수열의 세 번째 시집 <바람의 목례>가 대전에 있는 도서출판 애지에서 나왔다. 1959년 제주도에서 출생한 김수열 시인은 1982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다.

그는 제주대학교 사범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한 후 줄곧 제주도에서 중·고등학교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교사 시인이다. 현재 그는 (사)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이며, (사)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제주도지회 지회장을 맡아 제주도의 문화예술 분야의 많은 일을 해내고 있다.


지난해 산문집 <섯마파람 부는 날이면>을 펴냈으며, 시집으로는 <어디에 선들 어떠랴>, <신호등 쓰러진 길 위에서>가 있다.

아부지-
아부지-
제발 눈 좀 감읍서
원수도 갚고 代도 이으크메
이제랑 제발 눈 좀 감읍서

시절 잘못 만나
영문도 모른 채 옆구리에 총 맞고
쿨럭쿨럭 선지피 흘리는 아버지 끌어안으며
꺼이꺼이 소울음으로 통곡하던
젊은이가, 이튿날
아버지 쓰러졌던 바로 그 자리에
전홧줄로 포박 당한 채 꿇려 있다

아부지-
불효자식을 용서허십서
代도 잇지 못허고
원수도 갚지 못허고
아부지 따라 나도 감수다
장가날 받아놓고
고팡에 숨겨둔 산디쌀 그대로 놔두고
아부지 따라 나도 감수다
아부지-
아부지-

- '끊어진 대代' 전문



인용한 시에서 아버지가 억울하게 죽어간 다음날 "아버지 쓰러졌던 바로 그 자리에/전홧줄로 포박 당한 채" 이제 대(代)가 끊어지게 되었다고 아부지를 부르며 통곡하는 젊은이의 소울음은 누가 불러온 것인가. 이 젊은이의 죽음은 무엇 때문인가? 1948년 이른바 제주 4·3사건이다. 아니 4·3학살이라 부르자. 당시 제주도민의 3분의 1이 넘는 숫자의 민간인이 공산당(산사람)이라는 누명을 쓰고 학살당했다고 한다.

4·3은 제주도민들의 근원적인 상처이자 아픔이다. 인용한 시 이외에도 4·3사건을 다룬 시편들이 여러 개가 있다.


4·3사건으로 "원통하게 죽은 우리 아바님"의 참혹한 죽음을 고발한 '그 할머니', 국방경비대 소속 탈영병 세 명이 입산을 시도하다 미군에 붙잡혀 처형당하는 상황을 사진 넉 장을 통해 다큐멘터리적 어법으로 그려내고 있는 '사진 넉 장', 이제 국제공항으로 변한 정뜨르 비행장 활주로 밑바닥에 4·3 때 생매장 당한 뼈들의 아우성을 청각적 이미지로 가슴 아프게 그려낸 '정뜨르 비행장' 등이 모두 4·3사건을 형상화한 시들이다.

교사 시인 김수열은 시 '나는 선생이 아니다'에서 "오른쪽 손목 아래가 없는 우리 반 이윤이의 손을 덥석 잡고 뭉툭한 손목에 스스럼없이 입맞춤하기 전에는" 선생이 아니다라고 한다.

또 교육 현장의 체험을 살려 쓴 '대혁이', '민달팽이', '시험 시간', '거짓말' 등의 시편에서는 소외받는 아이들에게 진실과 사랑의 마음으로 다가서는 선생님의 진면목이 녹녹히 배어 있다.

김수열 시인의 눈은 이렇듯 '상처와 아픔'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약한 자들에게로 향해 있다. 시 '내 친구 금남이', '연변 여자', '악어의 눈물', '노숙자의 꿈' 등에서 우리는 분명히 그걸 확인할 수 있다.

시집 제목 '바람의 목례'를 얻은 시 '두 개의 삽화'도 정신지체 장애우들의 땀방울에 시인의 시선이 머물고 있다. 시속의 두 개의 삽화 가운데 앞쪽 삽화는 태풍 매미로 가두리 양식장이 송두리째 뒤엎어져버린 늙은 어부의 눈망울과 방파제의 낚시꾼들의 대비가 그것이다.

뒤쪽 삽화는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우우리가나나므을도도우울수이이따느느은게너너무우기기뻐어요나믜도도우움마만바받따가아이이러러케자자그은히히미지마안너너무기기부부니조아요가가암사해요서서로도도우며면서사사라지요아아안그래요?

수재민들에게 폐를 끼쳐선 안 된마며
먹거리 손수 해결하면서
작은 일손 거들고 있는
정신지체장애우들의 땀방울

바람도 그 앞에선 잠시 목례를 한다

- 시, '두 개의 삽화' 부분


정신지체 장애우들의 서툰 말소리를 따라 옮겨 적는 일도 내게는 쉽지 않고 불편하다. 저 장애를 안고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픔과 어려움을 우리는 이해하고, 그 아픔에 함께 참여해야 한다.

"아아 안그래요?"라고 말하는 시인의 목소리에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도우는 이들의 땀방울에 바람도 목례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게 바라보는 시인의 눈이 깊고 아름답다.

김수열 시인이 목례를 하고 시로 끌어안는 것이 다 이런 것들이다. 4·3사건과 같이 아픔과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의 그늘이 다 김수열의 시가 된다.

바람의 목례

김수열 지음,
애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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