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 가장에게 박수를 보낸다

등록 2006.05.19 16:33수정 2006.05.20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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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이른 더위로 한낮의 햇볕은 제법 따가운 날, 여의도의 금융회사에 근무하는 사촌 형님을 뵈러갔다.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직업전선에 뛰어들어 가정과 직장을 병행해온 그녀는 입사한 지 벌써 20년이 되었다. 90년대 말 그 무시무시한 구조조정의 위기와 여성이 가진 불리함을 이겨내면서 그녀는 이제 당당히 회사의 중역이 되었다. 오랜만에 만나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하기 위해 우리가 회사 근처의 식당으로 들어간 시간은 오전 11시 30분! 점심을 먹기엔 좀 이른 시간이었다.


점심시간에 식당을 향하여 걸어가는 사람들
점심시간에 식당을 향하여 걸어가는 사람들송춘희
그렇지만 몇몇 테이블에는 벌써 식사를 하고 있는 회사원들도 있었고 20~30분 만에 사람들로 빽빽하게 들어찼다. 빈 테이블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식사를 하면서 한번 씩 고개를 들 때마다 넥타이를 맨 그 엄청난 숫자의 화이트칼라들이 나를 이유 없이 아련하게 만들었다. 그들을 보면 왠지 우울하고 답답함이 느껴진 것은 그들의 모습에서 바로 내 남편, 내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일하기 위해서 먹는다.”, “먹기 위해서 일 한다.” 둘 중 어느 것이 맞는 표현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그들은 이 두 문장을 대변하듯 열심히 수저를 놀렸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90년대 초반에 들어서면서부터 모든 월급이 온라인 통장을 통해 가정으로 전달되기 시작했다. 가슴에 두툼한 봉투를 넣고 그날만큼은 일하는 기쁨을 느꼈던 이 도시의 화이트칼라들에게 이는 표현할 수 없는 허전함이었을 것이다.

형님의 아버지! 그러니까 내게 시고모부님은 은행원이었다. 형님은 아버지를 회상하며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고모부님의 월급날은 매월 25일이었다고 한다. 형님이 그날을 유독 기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날만큼은 고모님의 손길이 무척 바빴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편을 위해 고기 한 근을 사서 정성스레 국을 끓이고 남편이 좋아하는 찰밥을 지었다. 고기를 사러 가서도 이 고기가 좋을지, 어제 들여온 것은 아닌지, 꼼꼼히 따져가며 남편을 위해 가장 맛있는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덕분에 아버지의 월급날인 25일은 온 가족이 부푼 마음으로 저녁을 맞이했었단다. 다음 날 아침 회사로 나서는 아버지의 어깨가 당당해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비록 적은 돈일지는 몰라도 월급을 가져오는 날만큼은 가장들의 가슴은 부풀어 올랐고 전업주부였던 아내들은 다소 미안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 앞에서 부지런히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월급날 두툼한 봉투를 만지기 전에 온라인으로 입금된 월급은 각종 카드 값 등 자동이체 되기 바쁘다. 결국 직접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현금은 그리 크지 않다. 문명의 이기란 필요 없는 노동을 줄이고 편리함을 가져다주었지만 이렇듯 수많은 가장들의 작은 기쁨을 앗아가기도 했다.

형님과 내가 느린 식사를 하며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 동안, 벌써 옆 테이블은 세 번이나 손님이 교체되었다. 자신의 집에 불 난 소식이라도 들은 듯 분주한 걸음, 번쩍이는 손놀림, 불안한 눈빛들! 대체 그들은 어디에서 위로를 받고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이 남기고 간 수저와 남은 반찬, 밥그릇을 치우고 있는 아주머니의 손길로 자꾸만 눈이 갔다.


바쁜 걸음으로 업무에 복귀하려고 회사에 돌아가는 모습
바쁜 걸음으로 업무에 복귀하려고 회사에 돌아가는 모습송춘희
광화문 네거리, 시청 앞 광장, 여의도 금융가, 강남의 테헤란로, 서울 도심 그 어느 곳에서도 11시 30분이면 우리는 쉽게 그들을 만날 수 있다. 그분들이 있음으로 나의 생활이 편안했음을, 지금 이 순간의 우리나라가 존재했음에 새삼 감사함을 느끼며 존경의 인사를 올리고 싶다.

덧붙이는 글 | SBS U 포터에도 송고합니다.

덧붙이는 글 SBS U 포터에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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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입니다.세상에는 가슴훈훈한 일들이 참 많은 것 같아요. 힘들고 고통스러울때 등불같은, 때로는 소금같은 기사를 많이 쓰는 것이 제 바람이랍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 앵그르에서 칸딘스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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