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동안 ‘잠시(?)’ 쉬고 있었을 뿐, 작품 활동을 그만둔 것은 ‘절대’ 아니라며 웃는 황인경 작가.나영준
‘학자 정약용 VS 장군 고선지’
둘의 공통점은 무얼까? 실학의 집대성자로서 조선의 대표적 문인이던 정약용과 고구려 유민으로 아득한 시절 당나라의 서역 정벌을 지휘했던 무인 고선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두 사람은, 그렇다. 바로 한 여성작가에 의해 소설로 조명된 바 있는 인물들이다.
지난 1992년 출판돼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며 지금까지 3백 만권이 넘게 팔린 밀리언셀러 <소설 목민심서>와 ‘전남일보’에 인기리에 연재되며, 지난 1996년 출판된 <돈황의 불빛>이 그것.
우연한 기회였다. 이삿짐을 정리하다 잊힌 첫사랑의 사진을 발견하듯, 서류를 찾다 책장 머리에 꽂힌 <돈황의 불빛>을 접하게 된 건. 다시 소설을 읽었고 책장을 덮었을 때 자연스럽게 황인경이라는 작가가 떠오르며 그녀의 근황이 궁금해졌다.
“외도? 좋은 글을 쓰기 위한 한 과정일 뿐”
궁금증을 풀기 위해 황 작가를 찾아간 곳은 책 먼지가 들썩이는 작업실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서울 강남에 자리 잡은 말끔한 호텔의 사무실이었다. 1996년 <돈황의 불빛>을 마지막으로 작품 활동을 중단한 황인경. 1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녀는 작가 말고도 호텔 웨딩컨설팅 사업부의 부사장, 오케스트라 감사, 교회 집사 등 여러 개의 직함이 생겼다.
웨딩컨설팅 사업부를 총괄하고, 오케스트라를 꾸리고, 신앙생활에 집중하며 외도를 해 온 그녀. 하지만 예비 신랑신부들의 사랑을 돕고, 음악을 접하고, 마음의 평안을 꿈꿔서일까? 50대 초반에 들어섰음에도 그녀의 모습은 <소설 목민심서>에 새겨진 14년 전 사진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오히려 생기가 넘쳐났다.
<소설 목민심서>를 구상하고 집필한 기간이 7년, <돈황의 불빛>을 신문에 연재하고 출판하는데 2년이 걸렸으니 어찌 보면 황 작가에게 10년은 그리 길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궁금했다. 혹 이제 작가라는 본업을 등한시하는 것은 아닌지.
황 작가는 그 동안 ‘잠시’ 쉬고 있었을 뿐, 작품 활동을 그만둔 것은 ‘절대’ 아니라며 이 모든 활동이 궁극적으로는 작품에 영향을 미칠 과정이라는 진단을 빼 놓지 않았다.
“새로운 작품을 구상 중인데 조만간 집필에 들어갈 거예요. 민감한 내용이라 자세히 말씀 드릴 수는 없지만요. 가슴을 울리는 작품을 쓰고 싶은 건 작가의 욕심 아닐 까요. 예비 신랑 신부들의 사랑을 돕는 일은 즐거워요(웃음). 음악도 그렇고요. 소설이나 음악이나 종교나 사람들에게 위로와 위안을 준다는 점에선 한길을 간다고 할 수 있죠.”
글 쓴다는 것은 발가벗겨 진다는 것을 깨달은 어린 시절
문득 작가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 궁금해졌다. 그러자 그녀는 자못 심각하게 초등학교 4학년 시절의 추억을 떠올렸다.
“사생대회 때 무역업을 하시던 부모님이 일본으로 출장을 떠나시는 바람에 혼자 갔었어요. 그래서 서운한 마음을 솔직하게 글로 표현했는데 조회 시간에 교장선생님께서 잘 썼다며 제 글을 전교생 앞에서 읽으시는 거예요. 그 때 어찌나 부끄럽던지… 글을 쓰는 게 이렇게 ‘발가벗겨 지는 거구나’ 하는 생각에 다시는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었죠.”
황 작가는 당시의 아련한 추억이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을 지나도록 가시지 않았다고 한다. 선생님들이 ‘글쓰기에 재능이 있다, 좋은 글을 한 번 써 보자’며 내민 갖은 유혹의 손길에도 흔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그녀가 ‘스스로’ 글을 쓰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스물한 살에 결혼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데 아이들에게 읽어 줄 책이 별로 없더라고요. 그래서 제대로 된 책을 한 번 써 보자며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제 나이 스물아홉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