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프론으로 셰익스피어 연극을 보러 가다

[샤프론 체험기①] "엄마, 사진 찍는다고 난리 피우지 마!"

등록 2006.05.27 12:36수정 2006.05.31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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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샤프론'으로 따라갈 거야?"
"어딜 가는데?"
"스탠튼으로 셰익스피어 연극 보러 간대."


큰딸이 영어 시간에 연극을 보러 가는데 샤프론으로 따라가겠느냐고 묻는다.

미국의 학교가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샤프론(chaperon)' 제도가 있다는 것이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 나와 상을 받게 된 미녀들이 이따금 수상 소감에서 언급하는 '샤프론'이라는 말은 사전적인 의미로 '젊은 미혼 여성이 사교계에 나갈 때 시중을 드는 보호자'를 뜻하는 말로 대개는 중년 여성을 일컫는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 미국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참여하는 교외 활동(소풍이나 견학, 그리고 자신이 속한 클럽에서의 행사)에 자원봉사자로 나서는 학부형을 지칭하는 말이 바로 '샤프론'이다.

샤프론의 역할은 인솔 교사를 도와 활동에 참여하는 아이들의 인원을 점검하고 이들이 밖으로 새지(?) 않도록 아이들을 지키고 그들의 안전을 돕는 '도우미'로 일종의 보조교사인 셈이다.

이번 학기에 중학생인 작은딸은 고등학생인 큰딸에 비해 학교 밖 활동이 많았다. 사회 시간에 1, 2차 세계 대전을 공부하고 난 뒤 워싱턴 DC에 있는 '홀로코스트 박물관'과 '한국전쟁 기념관' '베트남 기념관' 등을 참관했고, JMU(James Madison University) 캠퍼스를 둘러보는 '대학 투어'와 소풍 그리고, 밴드부에서의 연주 여행과 경연대회 등의 교외 활동이 있었다.


이러한 교외 활동은 대부분 돈을 내야 한다. 우선은 버스를 타고 가게 되니까 버스 경비가 필요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입장료를 내기도 한다.

작은딸은 홀로코스트 박물관을 견학하는 데 25달러를 냈다. 이곳에서 워싱턴 DC까지 갔다 오는 교통비인 셈이다. 그런데 돈을 내야 하는 이런 교외 활동에 대해서 학교에서는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 대한 배려도 빠트리지 않는다. 그래서 '필요하다면 경제적인 지원이 가능함(Financial assistance available if needed)'이라는 문구가 언제나 신청서에 적혀 있다.


이런 학교 밖 활동에 샤프론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들의 교외 활동 안내문에는 학부형들의 샤프론 참여를 환영하는 문구가 들어가 있다(We welcome parents to join us on this trip as chaperones)'

'학부형의 샤프론 참여를 환영합니다.'
'학부형의 샤프론 참여를 환영합니다.'한나영
그런데 우리 생각으로 좀 이해가 안 되는 점이 있다. 바로 자원봉사자로 참여하는 샤프론도 똑같이 돈을 내야 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돈은 학생들이 내는 금액과 같은 경우도 있고, 그보다 좀 적게 내는 경우도 있다. 공짜는 절대로 없다.

우리나라에는 없는 이런 샤프론 활동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있던 나는 아이들의 교외 활동에 따라가 보고 싶었다. 그런데 고등학생인 큰 딸은 학교 밖 활동이 별로 없었고 중학생인 작은딸은 샤프론으로 따라 가겠다는 나를 언제나 박대(?)했다.

사실 홀로코스트 박물관은 나도 안 가본 데여서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작은딸은 남 앞에 나서거나 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조용한 성격인지라 엄마가 샤프론으로 따라 나서는 것도 싫어했다.

그런데 이번에 큰딸이 내게 샤프론을 제의한 것은 좀 의외였다. 왜냐하면 큰딸은 '질풍노도'의 시절을 보내고 있는 무서운 10대인지라, 엄마와 함께 어딜 가거나 같이 뭘 하는 걸 싫어한다. 더구나 엄마가 드러나는 건 더더욱 싫어하던 터라 이번 샤프론 제의가 반갑기는 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솔직히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어디 안 가본 데를 구경가는 것도 아니고, 특이한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놀이공원에 가서 뭘 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이 나이에도 놀이공원이 즐거우냐고? 마음은 언제나 청춘!).

하여간 그런 재미있는 곳이 아니고 고리타분한(?) 셰익스피어 연극 감상이라니…. 연극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건 정겨운 모국어 연극 감상이 그렇고 이건 영어 연극, 더구나 셰익스피어 당시의 고어 말투로 연극을 한다고 하니 마음이 내킬리가 있겠는가.

그렇지만 딸에게는 샤프론으로 따라 가겠다고 했다. 왜냐하면 평소에 엄마를 경원시하던 딸인지라 그런 데 끼워준(?) 것만 해도 감지덕지했고, 머지 않아 우리 품을 떠나 독립하게 될 딸이 '함께' 하자고, '함께' 가자고 하면 웬만하면 그대로 들어준다는 게 우리의 방침이기 때문이었다.

"엄마, 그 대신 '조용히' 있어야 돼. 사진 찍는다고 '난리' 피우지 말고."
'아니, 지지배. 어디서 불경스럽게 제 어미에게 '난리'라는 말을….'

"엄마 만날 그러잖아. 어디 가면 사람들 만나서 귀찮게 물어보고 사진 찍고 요란을 떨잖아."
'얘야, 그래서 '기자' 아니니? 오마이뉴스가 뭐 할 일 없다고 엄마에게 기자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줬겠니? 기자 정신 몰라? 기자 정신!'

하여간 나는 이런 모욕적인(?) 말을 들으면서 딸의 샤프론으로 셰익스피어 연극을 보러 갔다. (계속)

스탠튼에 있는 '어메리컨 셰익스피어 센터'의 팸플릿
스탠튼에 있는 '어메리컨 셰익스피어 센터'의 팸플릿한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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