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대가들, 일대일로 맞장 뜨게 하다

[서평] 흥미로운 신간 <고전문학사의 라이벌>을 읽고

등록 2006.05.29 17:54수정 2006.05.29 18:05
0
원고료로 응원
글을 시작하면서 : 그들은 라이벌인가

1995년에 출간된 웹스터 사전에 따르면, 라틴어 'rivalis'에 어원을 둔 라이벌은 "다른 사람을 능가하거나 필적하고자 시도하는 사람 혹은 다른 사람과 동일한 목적을 추구하는 사람"을 뜻한다. 후자의 의미에서 라이벌은 '경쟁자'로 번역 가능하다. 라이벌에 담긴 다른 뜻은 "어떤 특별한 관점에서 다른 사람과 동등하거나 거의 필적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여기서 반복되는 '다른 사람'은 일차적으로 최소한 동년배이거나 동시대인을 가리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미 죽은 사람과 경쟁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거나 시대착오적인 행위일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마음속으로 뛰어난 선각자들과 비견할 수는 있으되, 그들을 경쟁상대로 삼는 일은 불가능하거니와 우스꽝스러운 노릇이기에 그러하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서책 <고전문학사의 라이벌>은 제목이 그다지 적절해 보이지는 않는다. 저자들이 밝히고 있는 것처럼 월명사와 최치원은 150년의 시간적 거리를, 김부식과 일연은 131년 시차를 지니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지향하고 있던 생의 최종 목적지 또한 각양각색이었으며, 생전에 상호 경쟁자로 인식한 경우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만들어지는 라이벌 관계 : 이인로와 이규보

a <고전문학사의 라이벌> 겉그림.

<고전문학사의 라이벌> 겉그림. ⓒ 한겨레출판

<고전문학사의 라이벌>에는 모두 아홉 쌍의 라이벌이 등장한다. 그러니까 글쓴이들은 열여덟 사람에 이르는 고전대가들을 상호경쟁 혹은 대립관계로 엮어내어 그들 내부의 관계뿐 아니라, 시대와 역사에 대한 이해와 통찰을 시도하고 있는 셈이다. 이들 가운데서 최충헌의 무신정권 시기에 활동했던 두 문인 이규보와 이인로의 면면을 살펴보자.

'두 시대의 충돌과 균열'이란 소제목으로 묶인 이인로(1152-1220)와 이규보 (1168-1240). 무신정권에 반대하며 '죽림고회'를 결성하여 우두머리 노릇을 한 이인로는 이른바 '용사'에 의지하였고, 그들을 비웃었던 이규보는 '신의'에 기댔다고 한다. 글쓴이에 따르면 이런 평가는 후대학자들이 내린 것이 아니라, <보한집>의 최자를 비롯한 당대의 평가였다.


"용사(用事)는 이미 존재하는 명문(名文)의 표현이나 관련사실을 다시 끌어다 쓰는 창작방식이고, 신의(新意)는 옛사람의 표현을 되풀이하기 보다는 새로운 착상과 표현을 중시하는 창작방식이다." (96쪽)

용사에 의지함은 뛰어난 선인의 문장과 문체를 연마하여 자기 것처럼 만들어내는 것을 뜻하며, 신의에 기댄다함은 그런 자세를 구태의연한 것으로 보고 새로운 창작방식을 시도하는 자세를 의미한다. 문제는 용사나 신의가 독자적으로 작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문학은 과거와 대면하면서 부단히 현재를 성찰하고 다가올 날들을 예비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파한집>을 남긴 이인로와 <백운소설>을 전한 이규보의 창작방법론은 단순한 기법상의 차이를 노정한 것이 아니라, 세계관에서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사라져가는 귀족세력의 대표로 이인로를 수용하고, 새로 발흥하는 사대부의 표상으로 이규보를 독서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창작방식이 세계관과 직결된다는 것이 글쓴이의 시각이다.

"이인로와 이규보, 두 라이벌의 만남 혹은 대결은 어쩌면 이미 승부가 결정되어 있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인로와 그의 시대가 이규보와 그의 시대에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단지 이인로가 나이가 많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한 시대와 다른 시대를 표상하는 존재였다. 두 시대가 낡은 귀족과 신흥사대부에 속하는 두 인물을 통해 구현된 것이다." (116쪽)

새로운 글쓰기를 시도한 우정의 글벗 : 이옥과 김려

이인로와 이규보가 16년 나이 차이에도 양보 없이 맞섰던 관계라면 이옥(1760-1815)과 김려(1766-1821)는 평생을 함께 한 각별한 글벗이었다. 기존의 글쓰기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던 이옥은 문체반정의 연장선에서 패사소품체로 인하여 정조에게 고초를 겪으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견지하였다고 한다. 김려는 이옥을 거두고 기렸던 인물이다.

"이옥의 산문은 섬세하여 정사(情思)가 샘물처럼 용솟음치고, 그의 시는 가볍고 맑아 격조가 초각(峭刻)하다. 이옥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지금 사람이다. 나는 스스로 나의 시와 나의 산문을 쓴다. 그것이 선진양한과 무슨 관계가 있고, 위진삼당과 하등상관이 있겠는가?" 지금 이옥이 죽은 지 이미 5년이 된다. 우연히 상자를 뒤적이다가 이것을 발견하고, 그가 평생 부지런히 힘쓴 뜻을 슬퍼하여 붓으로 베껴 한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216쪽)

이옥이 남긴 <묵토향>을 엮어서 책으로 만든 김려의 후기 <제묵토향초본권후 題墨吐香草本卷後>에 담겨 있는 글의 일부다. 주목되는 점은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했던 조선시대에 이옥이 그것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대목이다. '문필진한 文筆秦漢 시필성당 詩必盛唐'이라 하여 "문장은 반드시 선진양한을, 시는 반드시 성당을 본받아야 한다"는 당대 주류문사들의 금과옥조를 이옥이 결연히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이옥은 '지금과 여기'를 살고 있는 문사가 어째서 '지난날과 다른 곳'에 연연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도전적으로 제기하였다. 그 결과 견책과 정거 (停擧) 뿐 아니라, 양반출신에게는 치욕적인 처벌인 충군 (充軍) 조처까지 당하지만 그는 자신의 태도를 결코 바꾸지 않는다. 이런 불온한 문사를 거둔 김려 또한 비어사건(飛語事件)으로 유배당하면서 민초들의 곤궁한 삶을 한시 형식에 담아냈다.

연기 피어나는 작은 마을엔/ 초가집 겨우 몇 채 뿐/ 주인이 나와 인사를 하고는/ 길게 탄식하네/ 해마다 폐정으로 의식이 부족해/ 온 집안 항상 울음소리 뿐/ 어른이야 어떻게 버틴다지만/ 어린 자식 어찌 길러낼지/ 귀한 손님 멀리서 오셨는데/ 죽 한 그릇 진실로 없답니다/ 가난한 형세로 그런 것을/ 천한 내가 뭐라 하겠소 (<과피도고>, 228쪽)

김려와 이옥은 당대 사대부들이 즐겨 다루었던 국가나 정치 혹은 우주만물의 이치와 같은 거대담론 내지는 정치한 형이상학이 아니라, 일상의 세태와 인물들에 눈길을 주었다. 그리하여 병졸과 노복 혹은 예인이나 포수, 장사치, 거지나 포수 등의 인물과 개구리나 물고기, 거미나 벼룩 등과 같은 하찮은 미물들을 시와 산문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옥과 김려는 거창한 명문만 내세우던 자들에게는 눈에 띄지 않던 인물들을 문학의 전면으로 끌어올려 그들의 내면에 간직된 진정을 기리고자 하였다. 그것은 그들과 대비되는 지배층의 허위의식에 대한 야유이기도 했다. 인간과 사물, 귀한 것과 천한 것, 남성과 여성을 동등한 개체로 존중하려는 의식이 그들을 진전된 이해로 이끌었다." (234-239쪽)

결론을 대신하여 : <고전문학사의 라이벌>에 담긴 의미

1993년 '창작과 비평'에서 펴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대한민국 사회에 '한국학'의 가능성을 알린 첫 번째 화살이었다. 저자의 화려한 언변과 객담이 대중적인 글쓰기를 통하여 세상에 알려짐으로써 지식대중화와 문화의 일상화가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상아탑'의 학문이 이른바 '강단비평'에서 저자거리의 삶으로 파고들기 시작하였던 셈이다.

거기에는 이제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해졌다는 풍요에 대한 인식과 서슬 퍼런 군부독재의 종언이라는 시대적인 배경도 크게 한몫하였다. 고문과 투옥과 학살의 일상이 제도화된 민주주의의 틀 안으로 자리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았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묻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영화 <서편제>가 그해 성공했음을 상기하시기 바란다.

그리고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오늘날 한국학은 가장 잘 팔리는 인문학의 대표적인 영역으로 자리하고 있다. <고전문학사의 라이벌> '책머리에'서 지은이들은 말한다.

"갑자기 밀어닥친 서구의 근대는 우리의 유구한 동양적 사유를 깨끗하게 지워버렸고, 우리의 우량한 문학전통마저 완벽하게 단절시켰다. 요즘 일고 있는 우리 고전문학에 대한 관심은 서구의 근대적인 문학관에 경도되던, 그리하여 우리의 풍성한 문학유산을 손쉽게 방기하거나 폐기하던 지난날의 태도를 반성하는 것과 무관할 수 없다." (6-7쪽)

지은이들이 제시하는 '반성적인' 자세와 태도는 소중하다. 자아를 배제한 채 대상과 물상 나아가 세계와 올바른 관계를 정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적 과거에 대한 깊이 있고 비판적인 성찰을 빼놓고서 현재와 미래에 대한 전망 역시 무망할 수밖에 없다. 이런 연유로 요즘 출간되고 있는 한국학 관련서적들의 명실상부한 질적인 성취를 곱씹어야 한다.

<고전문학사의 라이벌>은 우리가 잊어버린 고전대가들을 경쟁관계나 대결양상으로 묶어 논의함으로써 선명한 대비와 이해를 시도한다. 그러나 비교작업이 언제나 그러하듯 평면적이고 나열적인 대비와 부연설명은 지적인 흥미와 관심을 저해할 소지가 충분하다. 특히 대중적인 글쓰기가 전문용어와 충돌할 때 그런 문제는 더욱 두드러진다. (아아, 우리시대의 견고한 상업주의여!)

지은이들이 밝힌 것처럼 라이벌 관계로 포착한 몇몇 인물들의 연결고리는 상당히 취약해 보인다. 다른 형식으로 묶을 수 있는 인물들은 그냥 두어도 좋을 듯하다. 앞으로도 이런 성격의 교양서적 출판은 분명 줄을 이을 것이다. 과거를 돌이키면서 앞날을 예비하려는 우리의 태도를 고취하고 인도할 풍요롭고 흥미로운 서책의 연이은 출간을 진심으로 기원한다.

덧붙이는 글 | <고전문학사의 라이벌>, 시대와 불화한 천재들을 통해 본 고전문학사의 지평, 정출헌-고미숙-조현설-김풍기 지음, 한겨레출판, 2006.

덧붙이는 글 <고전문학사의 라이벌>, 시대와 불화한 천재들을 통해 본 고전문학사의 지평, 정출헌-고미숙-조현설-김풍기 지음, 한겨레출판, 2006.

고전문학사의 라이벌 - 시대와 불화한 천재들을 통해 본 고전문학사의 지평

고미숙 외 지음,
한겨레출판, 2006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인터넷 상에서 여러 사람들과 만나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고, 아름답고 새로운 세상 만들기에 참여하고 싶어서 회원으로 가입했습니다. 개인 블로그에 영화와 세상, 책과 문학, 일상과 관련한 글을 대략 3,000편 넘게 올려놓고 있으며, 앞으로도 글쓰기를 계속해 보려고 합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김건희·채상병특검법 부결, 여당 4표 이탈 '균열' 김건희·채상병특검법 부결,  여당 4표 이탈 '균열'
  2. 2 과음으로 독일 국민에게 못 볼 꼴... 이번엔 혼돈의 도가니 과음으로 독일 국민에게 못 볼 꼴... 이번엔 혼돈의 도가니
  3. 3 한국만 둔감하다...포스코 떠나는 해외 투자기관들 한국만 둔감하다...포스코 떠나는 해외 투자기관들
  4. 4 "KBS 풀어주고 이재명 쪽으로" 위증교사 마지막 재판의 녹음파일 "KBS 풀어주고 이재명 쪽으로" 위증교사 마지막 재판의 녹음파일
  5. 5 [이충재 칼럼] 윤 대통령, 너무 겁이 없다 [이충재 칼럼] 윤 대통령, 너무 겁이 없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