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개 내리던 지리산 바래봉 산행

[포토에세이] 질퍽한 산길에도 마음만은 경쾌했다

등록 2006.05.31 12:01수정 2006.05.31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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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내겐 사랑하는 사람의 달콤한 속삭임 같다. 어느 날 일상이 깔깔하고 메말라 힘들어지면, 나는 투정이라도 부리고 싶은 마음으로 산을 찾는다.

지난 28일 아침, 전날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에,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앞 베란다로 나갔다. 하얀 창 너머 바깥 풍경은 그 앞날에 내린 비로 온통 촉촉이 젖어 있었다.


나중이라도 주룩주룩 비가 쏟아지지는 않겠다는 생각에 나는 배낭을 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떠난 지리산 바래봉(1167m, 전북 남원시 운봉읍) 산행. 나는 전에도 몇 번 산행을 같이한 적이 있는 산악회를 따라나섰다.

바래봉은 산봉우리의 모습이 승려들의 밥그릇인 바리때를 엎어놓은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본디는 바리때 발(鉢), 뫼 산(山)을 써서 발산(鉢山)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세상의 빛깔 같지 않은 곱디고운 연분홍 철쭉꽃에 내 마음이 녹아들었다.
이 세상의 빛깔 같지 않은 곱디고운 연분홍 철쭉꽃에 내 마음이 녹아들었다.김연옥
우리 일행은 아침 7시 35분 마산을 출발하여 산행 기점인 정령치(1172m, 전북 남원시)로 향했다. 오전 10시쯤 지리산 국립공원 매표소를 거쳐 차도를 이용하여 마산서부터 타고 간 관광버스로 정령치까지 이동을 하는데, 갑자기 빗방울이 하나, 둘 유리창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꼬불꼬불한 고갯길을 오르면서 멀미가 나 속이 메스껍고 머리도 어지러웠다.

우리는 오전 10시 25분에 안개가 자욱하게 낀 정령치 휴게소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간간이 는개가 내리는 길을 계속 걸어갔다. 그날 정령치에서 고리봉(1305m), 세걸산(1220m), 세동치, 부운치(1115m), 철쭉 군락지, 팔랑치(1010m), 바래봉으로 능선을 타고 가는 산행 코스가 잡혀 있었다.

간간이 는개가 내리는 길을 걷고 또 걸었다.
간간이 는개가 내리는 길을 걷고 또 걸었다.김연옥
짙은 안개와 간간이 내리는 는개에 20m 밖 시계(視界)가 가렸다. 멀리 아름다운 전망을 바라다보는 즐거움 없이 계속 좁다란 오르막과 내리막길을 되풀이하면서 끝없이 걷고 또 걸었다. 더구나 잦은 비 탓인지 산길이 질퍽질퍽하여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래도 엷은 분홍빛 비옷을 걸쳐 입은 듯한 철쭉이 봄날이 갈 때까지 꿋꿋이 버티고 있어 참으로 반가웠다.


김연옥
머리카락을 흔들며 빗방울을 톡톡 경쾌하게 털고 있는 듯한 연분홍 철쭉꽃이 내게 소곤소곤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이 세상의 빛깔 같지 않은 곱디고운 연분홍 철쭉꽃에 그만 내 마음이 녹아들었다.

우리는 낮 1시쯤 세동치 부근에서 자리를 잡고 점심을 했다. 지난 봄에 딴 솔 눈으로 손수 만든 음료수를 가져온 분이 있었다. 두어 모금 마시니 내 입 가득 향긋한 솔향기가 배어들었다.


는개가 또 내리기 시작하여 우리는 서둘러 걸어갔다. 좁다란 산죽(山竹) 길을 걸을 때 마치 피아노 건반을 신나게 두드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서 경쾌한 모차르트의 음악도 떠오른다. 문득 지난해 모차르트 특유의 유쾌함과 동화 같은 줄거리 등으로 어린이들과 함께 감상하는 즐거움을 가졌던 오페라 <마술피리> 무대가 뜬금없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철쭉 군락지에서.
철쭉 군락지에서.김연옥
철쭉 군락지에 이르자 시야가 트여 기분이 상쾌했다. 바래봉은 본디 숲이 울창하였는데, 1971년 면양목장을 시범 운영하면서 양을 방목하자 독성이 강한 철쭉만 남기고 양들이 잡목과 풀을 모두 먹어 버려 자연스레 철쭉 군락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김연옥
바래봉 철쭉 군락은 마치 잘 가꾸어 놓은 철쭉을 옮겨 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우리가 그날 철쭉 군락지를 찾았을 때는 이미 철쭉꽃이 많이 저 버렸다.

나는 숲 관리사업으로 조성해 둔 산철쭉 꽃밭으로 그 아쉬움을 달랬다. 색색의 산철쭉꽃이 피어 있는 정겨운 꽃길을 걸어가니 내 마음마저 예쁜 꽃물이 드는 듯했다.

숲 관리사업으로 조성해 둔 산철쭉 꽃길.
숲 관리사업으로 조성해 둔 산철쭉 꽃길.김연옥
팔랑치로 가는 길에.
팔랑치로 가는 길에.김연옥
드넓은 산철쭉 밭이 꽃불이 되어 온통 붉게 물들었을 아름다운 팔랑치에도 거의 산철쭉꽃을 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는 자꾸 어슬렁거리며 거기에 오래 머물러 있고 싶었다.

팔랑치에서.
팔랑치에서.김연옥
팔랑치에서.
팔랑치에서.김연옥
그런데 벌써 오후 3시가 넘어 버렸다. 꼭 오후 4시 30분까지는 용산마을 철쭉공원주차장으로 와야 한다고 들었다. 나는 할 수 없이 바래봉 정상을 오르지 못하고 바로 용산마을 쪽으로 하산을 서둘렀다. 하산 길은 온통 싱그러운 초록빛 세계였다. 손을 휘저으면 내 손에도 초록이 금방 묻어날 것만 같았다.

하산하는 길에.
하산하는 길에.김연옥
그날 산행은 6시간이 걸렸다. 적어도 오십 번은 가야 지리산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난다. 나는 이번 산행이 겨우 두 번째이니 그저 남들에게 지리산은 큰 산이라는 말밖에 할 수 없을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산행 코스는 지리산국립공원 정령치 휴게소→고리봉→세걸산→세동치→부운치→철쭉군락지→팔랑치→바래봉→용산마을 주차장입니다.

덧붙이는 글 산행 코스는 지리산국립공원 정령치 휴게소→고리봉→세걸산→세동치→부운치→철쭉군락지→팔랑치→바래봉→용산마을 주차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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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3.1~ 1979.2.27 경남매일신문사 근무 1979.4.16~ 2014. 8.31 중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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