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의 꿈이 서려 있는 규장각, 위층은 주합루, 아래층이 규장각이다김정봉
규장각 운영체제에서 개혁적인 면이 엿보인다. 젊고 당색에 자유로운 인물과 서자 출신의 똑똑한 인물들이 등용되었다. 특히 정조 말년까지 138명이 배출된 중견 관료인 초계문신은 정조의 개혁정치의 중추적 역할을 하는데 이가환, 서유구, 정약용이 대표적 인물이다.
정조는 규장각 건립과 함께 친위부대인 장용영 설치를 추진하였다. 정조 실록에 따르면 장용영 설치를 두고 "호위를 하려는 것도 변란을 막기 위한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나의 깊은 뜻이 있다. 장차 내 뜻이 성취될 날이 올 것이다"라 하였다. 왕권 강화와 개혁 정치로 내몰린 기득권 층의 반발과 저항을 무마하기 위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친위부대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자신의 세력을 길러내는 노력과 함께 민심을 끌어안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개혁적 성향을 가진 인물 혹은 자신의 측근을 적극적으로 지방관으로 내보내 지방 사대부를 견제하는 한편 백성의 고통을 풀어주려 하였다. 다시 자신이 키운 인물을 중심으로 암행어사를 지방에 파견하여 수령을 감시, 감독하게 하였다. 수령과 암행어사를 동시에 자신의 손아귀에 쥐어 왕권을 강화해 나아가는 한편 백성에 다가서려 하였다.
또한 수령과 암행어사의 주요 일 중의 하나가 백성의 소리를 전달하는 것이었고 행찻길이나 능행길에서 백성의 소리를 직집 들으려 하는 등 백성과의 언로를 다방면으로 열어 놓았다.
서얼이 벼슬길에 오를 수 있도록 하였고 노비가 도망가더라도 다시 잡아들이는 노비추세법을 폐지하는 한편 금난전권을 혁파하여 중소 상인과 영세 자영업자의 자생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신해통공 조치를 실시하였다. 이런 일련의 정책은 양반의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고 상인 등 중인의 세력이 커지는 신분 변화에 따른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사회적 통합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정권이 안정되어갈 즈음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대외적으로 강력한 왕권을 표명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다. 하나는 양주군 배봉산(지금의 동대문구 휘경동)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를 화성으로 옮기는 작업이고 또 하나는 새로운 개혁을 이루어 가고 결국 정치적 공간의 이전까지 꾀하는 목적으로 수원화성을 건립하는 것이다.
정조가 즉위하면서 묘호를 수은묘에서 영우원으로 바꾸고 존호를 장헌이라 추상하는 등 아버지의 원혼을 달래는 작업에 착수한다. 근본적으로 효행의 일환이라 하지만 기저에는 역적으로 몰린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묘를 화성으로 옮기면서 묘호를 영우원에서 현륭원으로 바꾸고 곧 이어 능호를 융릉으로 격상시켰다. 정조는 한해에 몇 차례씩 능행길에 올라 자신의 효심을 대외에 드러내는 한편 백성의 소리를 직접 듣는 정치를 한다. 백성의 소리를 직접 들음으로써 민심을 끌어안으려는 노력이었다.
가장 대규모로 기획된 능행은 1795년 윤2월9일부터 17일까지 8일 동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맞아 거행되었다. 명분은 회갑연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굴레에서 확실하게 벗어나 정통성을 확보하고 수원화성에 대한 위용을 드러내 새로운 정치적 공간, 즉 개혁을 추진하는 개혁적 공간임을 암시하여 개혁의 힘을 과시하려는 목적이었다.
사도세자의 처벌을 적극 주장하여 결국 죽음으로 몰아간 김상로의 묘가 과천에 있다 하여 정조는 과천 길을 피하고 안양, 수원 길을 능행길로 잡는다. 지금 이 길은 너무나도 큰 길이 뚫려 예전의 흔적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는데 정조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있는 곳이 몇 군데 있다.
안양의 만안교는 이 때 세워진 것으로 조선 후기 대표적인 홍예교이다. 정조의 융릉 참배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나 지금은 실생활에 이용되는 아름다운 다리다. 몇 년 전에 쓰여진 책을 보면 만안교 밑으로 흐르는 물이 더럽고 탁하다 하였지만 지금은 비교적 깨끗한 물이 흘러 기분을 좋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