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들어오는 여인
한국 회화사에 드물게 여인의 속살이 등장하는 그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 그림을 보더라도 18세기 말, 이 무렵까지 여자의 젖은 2세를 양육하기 위한 신체의 일부 기관일 뿐 성애의 상징 유방으로 보지 않았다고 보입니다.
유방이란 말은 원래 의학용어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을 통하여 서양 의술이 들러오면서 묻어온 한자어입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젖, 젖통, 젖퉁이 등으로 불렀습니다. 수유기관으로의 호칭일 뿐 성적인 뉘앙스는 풍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자의 젖가슴은 다산풍요(多産豊饒)의 상징으로, 드러내놓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우리네 풍속이었습니다. 아이를 낳으면 유모를 댈 수 있는 궁중 여인과 사대부 마나님을 제외한 대부분의 여인들은 모유 수유기간이라는 표시와 아들을 낳았다는 징표로 젖가슴을 드러내놓고 다니는 것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구한말, 우리나라를 유린하던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인은 아프리카 야만족들처럼 미개하다고 선전하기 위하여 젖가슴이 드러난 기생들의 모습을 찍어 악의적으로 세계에 뿌렸다는 설도 있지만 최근에 우리 손으로 발굴한 평범한 여인의 모습에도 젖가슴이 드러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네 의식 속에서 젖과 유방은 언제부터 갈렸을까요? 여자의 몸을 상품으로 보기 시작한 20세기초가 아닌가 싶습니다. 영화산업의 발달과 대량소비를 부추기는 광고 기법은 여자의 몸에 하나의 가치관으로 묶여있던 젖과 유방을 떼어내어 유방을 상품화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