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일은 조국광복과 통일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선열들을 기리고 나라를 지키려다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들의 애국충정을 기념하는 날이다. 따라서 독립투사들과 애국지사의 숭고한 충정을 되새기며 이들의 얼을 후손들에게 널리 알리는 행사가 치러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충일은 부끄럽다. 친일매국노를 조상으로 가진 일부는 거대한 부를 지키며 번영창달을 구사하며 제왕열후가 부러울 것 없는 호의호식의 생활을 향유하고 있지만 상당수의 애국지사들의 후손들은 가난과 소외에 시달리고 있다.
해방 직후 한국에 진주한 미군정은 독립투사와 애국지사들을 경원한 대신 친일매국노들을 대거 미군정에 영입했다. 친일매국노일당이 민족을 배신하고 일본에 아부하고 충성했다면 저들은 미군정을 위해서도 충성을 다할 것이라고 계산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맥아더와 하지장군은 상당수의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가 섞여 있는 민족주의자들과 항일투사들은 사상적으로 신뢰하기 힘들다는 선입견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독립투사나 항일운동가 보다는 반공성향이 선명한 친일부역자들을 선호했던 것이다.
북쪽정권으로부터 축출된 친일경찰들은 대거 남한으로 내려왔다. 이들은 대개 일제에서 부패와 잔인성으로 점철된 악질경찰들이었다. 이들은 일본인에게 받은 돈을 이용해서 서울에서 경찰직을 얻었다.
이런 사실을 잘 알던 국립경찰 수사국장이던 최능진은 국립경찰은 일본에게 아부하던 친일경찰과 민족반역자들의 피난처라면서 “경무국은 부패했고 인민의 적이 되었다” 고 공언했었다. 이들 친일파경찰은 자신들의 전력을 잘 아는 독립투사에게 공산주의자의 혐의를 씌워서 철저하게 복수를 가했다.
북한에서는 일제강점시절 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엄정한 숙청 과정이 있었다. 그러나 다수의 친일파가 미군정의 경찰력과 사법권과 군력을 송두리째 틀어 쥘 수 있었던 남한에선 친일매국노와 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숙청 작업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었다. 그러므로 남한에선 이해하기 힘든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일제시절 친일파경찰에게 학대당하던 독립지사와 항일투사는 해방된 조국에서도 친일파출신의 경찰이나 군경에게 검거 당하여 고문당하거나 더러는 목숨을 잃은 적반하장의 세월을 맞아야했던 것이다.
남한만의 반쪽 선거로 미군정을 승계한 이승만 정권도 친일매국노들을 대거 기용함으로써 독립지사와 항일투사로 하여금 발붙일 곳을 업게 만들어버렸다. 이승만이 친일매국노일당을 선호한 것은 그들의 반공성향을 높게 평가했던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반공주의를 고수해야만 미국의 힘을 빌면서 반쪽정부나마 자신이 통치할 수 있다는 정치적 계산을 했던 것이다. 반민특위 위원가운데 일제경찰간부이며 해방 뒤 헌병사령관이 된 전봉덕과 육군소령이던 김정채는 국회민족반역자명단에 올라있는 사람이었다.
국회반민특위는 전봉덕의 역습을 받아 15명의 주동자가 헌병사령부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 해체되고 만다. 이런 상황이므로 남한에서의 항일투사나 독립지사의 삶은 신산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후손 역시 홀대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욱 기막힌 사실은 상당수의 친일매국노가 독립지사로 탈바꿈한 일이다. 친일매국의 역사청산은 반드시 이루어져야한다.
현충일을 형식적으로 치를 것이 아니다. 과거사를 밝히고 민족정기를 바르게 세울 책임이 우리들에게 부여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할 것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