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과 두려움, 그래도 나는 암벽을 탄다

언제나 열등생, 하지만 도전은 자신감을 낳는다

등록 2006.06.07 12:02수정 2006.06.07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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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암벽등반을 시작할 때부터 그랬다. 누가 박아 놨는지도 모르는 볼트에 확보줄(추락시 안 떨어지게 몸이나 장비를 확보물에 고정해 놓는 줄)을 걸고 몸을 의지한다는 게 믿음이 가지 않아서 몸을 의지하지 못했고 괜한 힘을 뺐다. 하강 볼트(바위에 구멍을 뚫고 구멍에 고정시키는 금속제 확보물)까지 가는 짧은 길을 엉금엉금 기어가 주위 사람들을 불안하게 했다. 기술과 체력을 따지기 전에 암벽등반을 하기에는 천성적으로 불안과 두려움이 많았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최근 다시 인수봉에 올랐다. 의심과 두려움, 불안과 두려움을 어깨에 잔뜩 지고 암벽에 오르는 일. 나는 왜 그런 무모한 몸짓을 다시 시작했을까.

낮 12시를 조금 넘긴 시작. 6월의 햇살은 눈부셨고 바위는 적당히 달궈졌다. 밤골에서 출발해 '숨은벽'을 우회해서 계곡길로 온 터라 적잖이 힘이 빠져 있었다. 숨은벽 초입에서 요기를 하고 샘에서 물을 실컷 마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휴식이 필요했다. 하지만 바위에 이미 상당수의 팀이 자리 잡은 터라 등반을 지체할 수 없었다.

버스 새치기라면 어깨라도 잡아끌겠는데...

40대의 노련한 몸짓
40대의 노련한 몸짓강현호
우리 일행 셋은 서둘러 장비를 착용하고 대 슬랩(각도가 약 30-70도 정도 되는 넓적한 바위) 오른편을 출발점으로 잡았다. 우리 뒤로 부부 한 쌍이 등반 짐을 꾸리고 있어서 꽤 조급한 등반이 될 듯싶었다. 확보(등반 도중 자신 또는 다른 등반자의 추락을 방지하기 위해 취하는 조치)를 하고 앞선 팀의 마지막 등반자가 오르길 기다리며 매듭을 묶고 있는데 뒤늦게 올라온 부부가 슬쩍 새치기를 한다.

순서를 지키는 미덕은 고사하고 앞 팀 사람이 남아 있는 상태라 그대로 가다가는 줄이 엉켜 위험해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등반을 시작하는 모양이 위험해 보였다. 버스를 기다리다 새치기 당했다면 어깨라도 잡아끌겠는데 아슬아슬 올라가는 사람을 불러 세울 수도 없고 난감한 노릇이었다.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한 피치(루트의 한 부분으로 클라이밍의 단위 역할)로 '오아시스'까지 오르기로 했다.


선등확보를 한 형이 출발하고 내가 맨 마지막에 자리 잡았다. 슬랩길이 나왔다. 붙잡고 힘쓸 곳도 별로 없는데 자꾸 팔에 힘이 들어가고 몸은 괜한 용을 쓰느라 괴롭다. 팔다리 굽히지 말고 관절을 펴고 힘을 덜 써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된다. 삼지점(몸의 균형을 잡는 연습)을 유지하는 안정감 있는 자세는 고사하고 신음소리나 새지 않으면 덜 민망하겠다. 걸음을 뗄 때마다 끙끙거려 따로 확보자에게 신호를 보낼 필요가 없을 정도다.

이마에서 흐른 땀이 눈썹에 맺히고 손바닥은 젖어 온다. 초크(부드러운 탄산마그네슘, 땀 제거)를 묻힌다고 나아질 것 같지는 않은데 허리춤에 초크통 하나 매달고 오지 않은 게 자꾸 후회된다. 겨우 오아시스에 도착했을 때는 안경에 떨어진 땀 때문에 앞이 뿌옇다.


형들은 가볍게 오른 길을 나만 무겁게 오른다

선등자를 따르는 확보자
선등자를 따르는 확보자강현호
점심때를 놓쳤으나 잔뜩 긴장한 탓인지 허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는 점심을 먹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바로 다음 피치를 시작했다. 인수A로 시작해 되도록 편한 길로 잡은 길의 시작. 그다지 고난위의 기술을 요하지 않았으므로 불필요한 힘을 쓰지 않았다. 정석대로 손이 아닌 발로 딛고 올라 중력을 이겨내면 되는 거였다.

하지만 몸은 무겁다. 유독 내 몸만은 중력을 무겁게 느끼는 듯한 착각이 든다. 그 느낌은 자연스런 연쇄반응을 불러일으킨다. 무거움, 허튼 몸짓, 체력 낭비, 자신감 상실, 허둥댐, 체력 소진이다. 형들은 가볍게 오른 길을 무겁게 오르는 나만의 공식이다.

겨우 마지막 걸음을 뗀 뒤 확보를 하고 숨을 헐떡이며 목을 축였다. 다음 등반이 바로 이어진다. 이번 피치에는 일명 '트레버스'라 부르는, 게처럼 옆으로 가야 할 길이 있다. 앞선 두 형은 신묘한 솜씨로 통과했지만 나는 감당 못할 역경이다. 발 디딜 곳이 보이지 않고 그렇다고 없는 힘 쓸 돌기는 더더욱 보이지 않는다.

먼저 올라간 두 형의 결정. "줄에 매달려라." 좋게 말하면 요령이고 진실을 말하자면 꼼수. 등반이라고 부르기에는 쑥스러운 몸짓. 하지만 등반하는 자의 자존심을 내세우기에 내 두려움은 너무 컸다. 옆으로 걷다 추락해야 1미터가 채 안 될 터이지만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발로 딛고 가는 게 아니라 줄에 매달려 더듬더듬 옆길을 마저 갔다.

한 피치를 더 끊은 뒤 사진도 찍고 뒤늦은 점심을 먹었다. 흰밥에 식초가 다 된 깍두기와 햄 몇 조각, 김밥이 고작이었지만 그만한 성찬이 없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볼이 미어져라 밥을 밀어 넣고 반찬을 씹는 그 꿀맛. 탁 트인 전경이니 더 바랄 게 없고 만족스러운 배를 두드리고 나니 살 것 같다.

그 뒤로 정상까지 2피치를 더 끊어야 했다. 선등한 형의 설명에 따르면 첫 피치가 가장 힘들었단다. 하지만 난 바윗길 난이도와 상관없이 시간이 지날수록 힘들었다. 기껏 추락해봐야 센티미터 단위인 나에 비해 미터 단위로 추락할 선등자도 거침없이 오르고 앞뒤로 두 사람의 확보를 보느라 허리가 휠 지경인 두 번째 등반자도 무리 없이 오르는 길에서 나는 자꾸만 멈춰 섰다.

오랜만에 신은 암벽화가 발끝을 뭉개는 것 같았고 뒤늦게 허기가 밀려와 몸에 힘이 빠져 나갔다. 목이 타 들어가 목젖이 입천장에 달라붙은 것 같은 괴로움에 사로잡혀 나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줄에 매달려 시간을 까먹었다. 남보다 못한 체력은 숨길래야 숨길 수 없었다.

바위는 내게 한계이자 도전

번갈아가며 쌀 한 가마니 무게를 끌어올려준 형들은 무척이나 괴로웠을 것이다. 제일 젊은 것이 팔팔하게 뛰어 올라와도 시원찮을 판에 잔뜩 겁을 먹고 바위에 달라붙어 낑낑대고 있었으니 허리는 아프고 해는 기울어 속은 타 들어 갔을 것이다. 연습바위라면 여기 디뎌라 저기 잡아라 설명이라도 해주겠는데 줄 하나로 오름의 상태를 알 뿐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나마 10년 전보다 나아졌다면 못 올라가겠다 나를 버리고 가라 소리는 하지 않았다는 것 정도다.

그렇게 남 확보도 봐 주지 않으면서 안간힘과 괜한 힘까지 다 써서 정상에 올랐다. 두 명 오르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쓰며 힘을 쏙 빼 눈은 풀리고 말도 제대로 못할 만큼 지친 상태다. 바윗길에 뿌린 땀, 두려움 때문에 허비한 시간, 곱으로 힘을 들인 형들에 대한 미안함을 기억해낸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본다.

이미 정상에 올라온 이들은 다들 즐거운 표정이다. 두려움이나 걱정은 없어 보인다. 나 혼자만 겁먹고 무력하고 열등하다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하강이다. 일행에게 믿음을 주지 못해 땅에 발을 딛는 순간까지 지켜보게 만든다.

감당하지 못할 길은 애초에 걷지 말아야 했던 건 아닐까 자문한다. 그러나 나는 또 다음 등반에 따라 붙을 작정이다. 심성이 암벽등반과 맞지 않고 실력도 누구보다 뒤떨어지지만 다시 하려고 한다. 왜? 무작정 좋은 것, 그저 좋은 것, 산, 바위, 그리고 좋은 사람과 함께 할 수 있어서인가? 그렇다. 나도 모르게 이끌림은 정말 나도 어쩔 수 없다.

또한 바위는 내게 한계이므로 도전이고, 도전이므로 자신감을 남긴다. 자신 있게 살 수 있다면 어떤 장애에도 불구하고 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싶다. 이것이 분명한 한계가 도사리고 있는 곳에 내 몸과 정신을 던져 무언가가 되고자 하는 힘겨운 몸짓을 거부할 수 없는 이유다.

도전이므로 절제와 노력이 뒤따를 것이다. 그리고 이 도전은 의심과 불안으로 가득한 내 몸을 맡길 수 있을 만큼 믿음을 주는 형들이 있었기에 가능함을 안다. 나로 인해 배로 힘든 형들에게 미안하고 또 고맙다. 때문에 땀과 진심과 맥주 한 잔을 형들에게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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