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의 <에밀>, 5분 만에 다 읽기

등록 2006.06.09 09:37수정 2006.06.09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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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구입한 책 <에밀>은 산수야 출판사에서 펴낸 것인데, 책 표지에 이렇게 적혀있다. “교육학 전공자로부터 자녀를 기르는 부모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어른을 위한 어린이 교육 지침서”라고. 이 말은 루소의 의도를 충분히 살려내지 못한 말인 듯하다.

물론 ‘어린이 교육지침서’인 면도 있지만 그것은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듯하다. 사실은 어린이가 아닌 우리 어른들을 위해서 인생관· 종교관· 사회관· 역사관· 문명관 등을 통찰할 수 있는 올바른 시각을 깨우쳐 주는 교육지침서인 것이다. 그래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어른들을 교육하기 위한 인생지침서”라는 표현이 더 정확한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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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이 <에밀>은 누구나 읽어야할 인생 지침서이자 시대 비평서 이다. ⓒ 송상호


나는 책을 읽을 때 밑줄 치는 버릇이 있다. <에밀>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다음의 이야기들은 마음에 와 닿는 구절(내가 밑줄 친 구절) 들을 통해서 이야기를 풀어 가보고자 한다.

“우리는 어린 시절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가장 현명한 학자들도 어린이에 대해 어른이 알아야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항상 어린이 속에서 어른을 요구할 뿐. 어른이 되기 전의 어린이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나의 주된 관심사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어린이를 좀더 주의 깊게 바라보고 관찰해야 한다. 왜냐하면 어린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어린이와 어른 사이는 너무 거리가 있어 도무지 양자를 연결 시킬만한 공통점이 없다.”

정말 그렇다. 어른들은 어린이들에 대해서 기본적인 것도 모른다. 사실은 모르면서 아는 체 하는 게 문제다. 모르면서 안다고 하는 것을 넘어서 마치 어린이들을 잘 아는 것 인양 어른들의 생각과 시각으로 강요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루소는 말한다.

“훈시하기 좋아하고 학자인 체 하는 우리들은 스스로 터득하는 편이 훨씬 좋은 것 까지도 가르쳐 주려고 애쓰고 있다.”

“우리는 어린이의 입장에서 생각 할 줄 모르므로 그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으며, 그들에게 우리의 생각을 주입할 뿐이다.”라고.

여기에서 교사들의 치명적인 오류와 딜레마가 드러난다. 교사란 기본적으로 가르치는 사람이 라고 생각하는 구조 속에서 과연 어떻게 극복해낼 것인가가 숙제이다. 인류가 존속하는 한 내내 숙제가 될 거라고 본다.

그러한 어른들이 어린이에게 자행하는 일을 <에밀>에서 이렇게 표현한다.

“사람들은 신앙심을 길러준다고 어린이가 싫증나도록 교회에 데리고 간다. 그러나 어린이는 더 이상 하나님께 기도드리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갈망하게 된다.”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가. 얼마나 어른들의 오류를 통렬하게 꼬집은 말인가. 이것이 바로 모든 시대에 걸쳐서 이루어져온 어른들의 교육방식인 것이다. 교육의 대상이자 주체인 어린이들을 무시한 채로.

그래서 루소는 말한다.

“어린이에게 노는 것을 잘 가르치면 모든 것이 다 된다는 식으로 생각될 정도이다.”

“그에게는 놀이가 곧 일이므로 일과 놀이 사이에 하등의 차이가 없이 행동할 것이다.”

어린이들에게 무언가를 주려고 하지 말고 놀게 하라고. 잘 노는 것이 곧 진정한 공부라고 말이다. 요즘 세대의 부모들이 참 실행하기 힘든 요구이지만, 그것이 어린이들을 살리는 진정한 길인 것을. 그래서 루소는 “시간을 아끼지 말고 오히려 낭비하라”고 말한다. 그래야 어린이들이 건강해 질 거라고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교사의 역할을 루소는 언급하게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훌륭한 교육성과를 거두게 될 것이다.”

“훈계하지 않고도 지도하는 기술과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도 모든 것을 성취시키는 기술이 필요하다.”

“아이들에게 꼭 길러주어야 할 유일한 습관은 어떠한 습관에도 물들지 않는 습관이다.”

우리는 뭔가 하는 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루소는 우리에게 “하려고 하지 말라. 하지 않으면서 지도하라”라는 참으로 어려운 주문을 해오고 있는 것이다. 순간마다 의식하지 않으면 지키기 힘든 과제라 하겠다.

“어린이는 복종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필요에 의해서만 행동하도록 해야 한다.”

“권위에 복종하는 학생은 지시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 말에서 드러나듯이 아이들에게 권위에 복종하도록, 가르쳐진 것에 복종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게 루소의 주장이다. 권위에 복종하여 행동하는 어린이는 결코 자율적인 인간이 될 수 없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루소는 “문제는 무지가 아니라 잘못된 생각에 있다.”

라고 말하면서 교사의 일방적인 주입이 어린에게 미치는 영향을 아주 적절하게 나타내고 있다.

그러면서 루소는 “어린이를 불행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그 즉시 손에 넣을 수 잇도록 버릇을 들이는 것이다.”

“진리를 가르치는 것보다 진리를 발견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의 잘못을 곧바로 시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등의 말을 통해 ‘어린이가 스스로 체득하게 하라’고 강변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지도하는 일의 핵심이리라.

그러려면 교사가 갖추어져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교사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려면 교사는 더 갖추어져야 할 것이다. 그래서 루소는

“한 인간을 만들기 전에 스스로 인간이 되어야 한다.”

“어린이의 스승이 되려면 먼저 자기 자신의 스승이 되어야 한다” 라는 말로 교사의 자격과 자세를 말하고 있다. 자주 회자되는 단순한 논리이지만, 지키기란 얼마나 어려운 명제인가. 그래서 루소는 교사들에게 이런 사람이 되라고 강조한다.

“교사! 이 얼마나 숭고한 영혼인가, 진실로 한 인간을 만들려면 아버지가 되든지 인간 이상의 훌륭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라고. 그래 그렇다. 아버지의 심정이 아니고서, 더 나아가서 어머니의 심정이 아니고서 진정한 교사가 될 수 있을까.

이런 아버지로서의 교사가 되려면 교사 스스로 올바른 역사관, 사회관, 문명관 등이 있어야하지 않을까. 이에 루소가 제시하는 문제의 출발점은 이렇다.

“조국과 시민이란 말은 없어져야 한다. 나는 학교를 공공교육기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말로서 그 시대를 뒤흔들어 놓는다. 아니 지금 이 시대를 뒤흔들어 놓는다. 우리의 학교 교육의 근간이 “체제에 적응하는 올바른 시민 양성”이 아니던가. 그런데 루소는 과감하게 그 근간을 뿌리친다. 오히려 그는 “세상에서 행해지는 관습에 반대되는 것만 행하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로 우리들의 생각을 바꾸어 놓는다. 이게 교사가 가져야할 기본적인 생각이라니.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도시는 인류를 타락으로 이끄는 심연이다.”라는 생각 때문이다. 문명과 도시가 인류를 패망하게 만드는 지름길이라고 하는 그의 일관된 주장 때문이다. 도시화, 문명화가 인류를 피폐하게 만든다는 주장은 실로 자본주의와 시장경제가 태동하고 약동하던 당시로선 충격적인 선언이었을 게다. 그리고 학교에 대한 그의 시각까지도. 덧붙여서 “어떤 형태의 통치라도 자유는 없다. 자유는 자유로운 인간의 마음속에 있을 뿐이다”라고 말함으로써, 당시의 권력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말을 한다. 마치 아나키스트처럼. 그런 탓에 그는 계속 한곳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시대의 진정한 ‘아웃사이더’가 된 것이다.

이런 생각의 바탕위에 이루어지는 그의 주장이 바로 “자연으로 돌아가라”인 것이다.

“특별한 인간을 만들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다.”라는 말로 그의 주장을 전개한다. “정념의 근원은 자연이며, 그 근원은 수많은 작은 흐름에 의해서 불어나 큰 강물을 이룬다”라면서 그의 주장은 확고해진다.

그러면서 그 자연이란 것을 문명과의 대비해서 말하기도 하지만, 다음의 시각으로도 말하고 있다.

“정념의 원천이며 다른 모든 정념의 근본이 되는 것,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에 언제나 존재하는 유일한 정념은 자기에 대한 애착심이다. 이것은 근본적이고 본능적이며 다른 모든 감정에 선행하므로 그 외의 다른 감정은 그것에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모든 정념은 자연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라는 것. 즉 우리의 ‘자기애’에 대한 것도 ‘자연스러운 자연’이라는 주장이다. 사람들의 ‘자기’라는 근본을 자연으로 보는 것이다. 인간은 원래 자연과 하나라는 주장이라 하겠다.

그러면서 그는 “모든 기술 중에서 가장 으뜸이며 존경할 만한 것은 농업이다.”

“농업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며, 가장 정직하고, 유익하며 고상한 직업이다”라는 등의 말로 우리들에게 실제적으로 자연과 더불어 생존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넌지시 일러주고 있다. 도시화와 문명화에 반동하여 사는 길을 말이다.

물론 자연과 더불어 사는 길은 어린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혜택을 베푼다.

“모든 사람의 눈앞에 있는 유일한 책은 곧 자연이라는 것이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한 권의 책이며, 그 책에 의해서 어린이는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기억을 풍요롭게 하면서 언젠가 자신의 판단이 그것을 활용할 수 있을 날을 기다리는 것이다.”

정해진 텍스트가 있어야 공부를 제대로 한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던져주는 좋은 메시지라 하겠다. “자연이 곧 유일한 책”이라는 말은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명언인 듯하다.

여기서 잠깐, 루소의 종교관에 대해서 알아보자. 루소가 살던 당시는 아직도 종교라는 엄청난 권위와 권력이 존재하는 시대였기에 그의 주장은 사뭇 눈에 띈다. 그 시대를 거부한 몸짓일 게다. 그가 말한 “세상에서 행해지는 관습에 반대되는 것만 행하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것의 실천으로서 알아둘 만한 것이다.

“인간의 어떤 특수한 교리는 이 땅위에서 평화가 아닌 총과 칼을 가져와 인류의 죄와 불행을 초래하고 있을 뿐이다”라는 말이 현재 종교 간의 갈등이 세계의 분쟁에 서 있는 이유를 너무 분명하게 드러내 놓는 것이다.

그러면서 “종교의식과 종교 그 자체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라며 자신이 속한 종교의식에 빠져 세계를 보지 못하고 종교의 참 뜻을 놓쳐버리는 사람들에게 교훈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그는 이어서 “올바른 마음이야말로 신이 존재하는 곳이라는 것과 나라와 종교를 불문하고 신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종교의 핵심이며 종교의 의무와 윤리의 의무는 어떤 본질적이라는 것. 그리고 내면적인 신앙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그것 없이는 진정한 미덕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라며 종교의 진정한 역할과 본질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참으로 새겨둘 말이라 하겠다.

그러면 루소는 교육의 목적을 무엇으로 보았을까. (사실은 교육의 목적이 곧 인생의 목적과 동일한 것이다.)

“사랑하는 에밀, 우리는 행복해야만 한다. 이것이야말로 자연이 우리에게 준 최초의 희망이며, 또 절대로 우리에게서 떠나지 않는 유일한 희망인 것이다.”

그렇다. 루소는 사람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살아가고 교육받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행복해지는 길을 자연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그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행복 중에 제일가는 행복은 권력이 아니라 자유다”라는 말로 그의 행복론을 전개하고 있다. 자유란 자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그는 누차 강조해 왔다. “어떠한 형태의 통치에도 진정한 자유가 없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면 구체적으로 행복해지는 방법은 무엇일까. 행복을 알려면 먼저 불행의 원인을 알아야 할 것이다. 루소가 말한 불행의 원인은 이렇다. “불행이란 욕망과 능력간의 불균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라는 것. “인간을 불행하고 악하게 만드는 것은 지나친 욕망과 타인의 의견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라고 그는 강변한다.

그러므로 “ 참다운 행복에 이르는 길은 감당할 수 없는 욕망은 줄이고 능력과 욕망을 완전히 대등한 상태로 놓는 것”이며 “인간을 본질적으로 선량하게 하려면 욕망을 적게 하고 남들과 비교하지 말도록 해야 하는 것”이라고 행복에의 길을 제시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우리 모두의 불행인 허약함 때문에 사교적으로 된다. 무엇이나 부족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때 타인과 교제하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허약함 때문에 이런 작은 행복이 우리를 찾아오게 된다”라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선언을 하게 된다. 여기서 인류가 하나 되는 길, 인류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의 잘남과 강함은 오히려 우리 인류를 갈라놓지만, 우리의 허약함은 우리를 서로 의지하게 만든다는 것을.

루소의 <에밀>을 통해 무언가를 우리가 깨달았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루소의 말을 빌려보자.

"우리 시대의 오류 중의 하나는 너무나 이성에만 치우치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이성에만 맡기려고 하기 때문에 관념으로만 그치고 행동으로는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는다”.

바로 그거다. 루소를 논하지 말고 루소를 행해야 할 것이다. 아주 간단명료한 것이다. 루소의 주장이 바르다고 생각된다면 우리의 삶을 그렇게 하나둘 바꾸어나가야 할 것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에서 하나둘 해나가야 할 것이다. 그것이 참 교육자가 되는 길이 아닐까 싶다.

에밀 - 인간 혁명의 진원지가 된 교육서

장 자크 루소 지음, 이환 옮김,
돋을새김,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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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목사질 하다가 재미없어 교회를 접고, 이젠 세상과 우주를 상대로 목회하는 목사로 산다. 안성 더아모의집 목사인 나는 삶과 책을 통해 목회를 한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는 [문명패러독스],[모든 종교는 구라다], [학교시대는 끝났다],[우리아이절대교회보내지마라],[예수의 콤플렉스],[욕도 못하는 세상 무슨 재민겨],[자녀독립만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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