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시대' 이젠 경제민주화 중요"

윤종훈 회계사 연세대 강연회

등록 2006.06.13 17:17수정 2006.06.13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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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에서 1980년 5월 13일 먼저 교문 밖으로 뛰쳐나가고 서울역에 10만 인파가 모인 적이 있었지요. 그 얼마 뒤 광주항쟁에 대한 끔찍한 소식을 듣게 됐습니다."

6월 항쟁기념 및 이한열 열사 추모 강연회 '전두환 시대에서 이건희 시대로'의 연사로 나선 윤종훈 회계사(전 참여연대 조세개혁팀장, 윤종훈 회계사무소 대표)는 학창시절 민주화 운동의 기억을 술회하는 것으로 강연을 시작했다.

연세대 경제학과 80학번인 그가 이야기한 당시 대학사회의 현실은 오늘의 대학생인 참석자들에게 낯선 것이었다. 학교 안에 늘 사복경찰들이 상주하던 당시 운동권 학회의 당사자로 적발되어 강제징집 당했던 윤씨는 학생운동의 뿌리가 뽑힌 뒤에는 노동현장으로 들어갔다.

그는 광주항쟁 때 운수노동자들이 군경의 저지선을 뚫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택시회사에 들어가기로 결심했고 택시기사 자격을 취득하기 위해 우선 자동차정비공이 되었다고 했다.

"이타적 본성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8일 연세대에서 강연한 윤종훈 회계사
"이타적 본성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8일 연세대에서 강연한 윤종훈 회계사김수민
"80년대에 맑스-레닌주의와 소위 주체사상이 들어오게 되어서, 정통 맑스-레닌주의인 PD(민중민주계열)와 통일을 중시하는 NL(민족해방계열)이 치열한 다툼을 벌였어요. 택시운전할 적에 맨날 엔엘하고 피디가 싸우니까 현장노동자들이 죽어나는 거에요. 안 그래도 12시간 일하고 피곤한데, 엔엘이랑 피디랑 서로 조직활동한다고..."

얼마 전 연극 <'오늘의 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에서도 그러했듯 NL과 PD의 싸움은 운동권 회상의 주요 소재였고, 다소 호사가적으로 소비되기도 했다. 그러나 참석자 가운데 나이가 어린 축에 드는 학생들은 그 싸움의 재미있는(?) 후일담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아 세월이 흘렀음을 실감케 했다.

그러나 동문 선배가 이야기하는 캠퍼스의 추억은 후배들 모두에게 가깝게 여겨졌다. 윤씨가 80년대 후반 학교를 떠났던 학생운동가들과 함께 대거 학교로 돌아오게 되었었다며 "'운동권 장학금'이 나와서 학생들이 학비도 면제받곤 했다", "중앙도서관 지하 있죠? 늙은 복학생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경로당'이라는 별칭까지 붙여졌다"고 이야기하자 진지하게 경청하던 학생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회계사가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전두환 시대'에 이어 '이건희 시대'에 대한 강연은 그가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불리우는 공인회계사에 합격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는 잘 나가던 회계법인을 그만두면서 "회계사는 자본주의의 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개"라는 교훈을 얻고 말았다고 한다. 회사의 분식회계 행태에 적응하지 않으면 업계에서 살아남기가 힘든 환경이었던 것.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의 표현대로 '암흑의 길'로 들어선다.


그는 "6월항쟁 이래 정치권력은 민주화됐고, 80년대 후반부터 삼성 현대 해태 진로 등 여러 재벌 대기업에서도 세습을 통해 2세경영인 체제가 들어서면서 권력이 정치에서 자본으로 이행하였다"고 진단했다. 또한 IMF 이후의 한국 사회는 그에게 새로운 전기를 가져다 주었다. 재벌대기업의 전횡은 계속되고 사회양극화가 심화되는 것에 대한 깨달음 덕분이었다.

"한때 함께 택시회사를 다녔던 친구의 자살도 저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경제민주화에 눈을 뜨면서 참여연대에 참여하게 되지요."

참여연대 조세개혁팀이 본격적으로 출발하면서 윤씨는 삼성SDS가 이재용 씨에게 주식을 싸게 파는 와중에서의 탈세를 적발했다. 그러나 2000년 5월 그가 국세청에 정식으로 탈세·제보를 하여 안정남 국세청장에게 "법대로 하겠다"는 언약을 받았음에도 일이 흐지부지되기 시작했다.

"오마이뉴스가 선풍적인 인기를 일으킬 때 제가 10일동안 국세청장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삼성의 문제점을 고발했고, 이것이 당시 매번 톱기사로 올라갔었습니다."

2000년 12월 4일, 윤종훈 회계사는 국세청 앞에서 1인시위에 들어간다. 1인시위는 한국에서 최초로 벌어진 일이었다. 국세청 주변에는 삼성 소유의 종로타워가 있었고, 그 안에는 온두라스 대사관에 들어서 있었다. 대사관 주변에서는 시위를 할 수 없다는 집회·시위법에 따라 국세청 앞에서 합법적으로 시위를 벌일 수 있는 방법이 없었던 것. 그러나 법률적으로 집회·시위는 '다수인'이 하는 행위로 규정되어 있고 그 다수인이 '2인' 혹은 '3인'이라는 사실에 착안하여 '1인시위'가 탄생했다.

"처음에는 해보고 나서라도 '꽥'하자는 심정이었지만 반응이 좋아서 나중에는 릴레이시위로 이어지게 되었지요."

'삼성을 보라'했더니 1인시위만 부각

그런데 언론에 의해 예상치 못한 문제가 터진다.

"나중에는 이게 '1인시위'를 부각시키는 쪽으로 가게 된 거에요. 삼성에 문제점에 초점을 안 맞추고 '1인시위 신기하다', '1인시위가 갖게 되는 시대사적 의미' 심지어는 '이걸로 박사논문을 쓰겠다'느니...(장내 웃음)"

물론 그 이면에는 언론이 삼성재벌에 장악당했던 현실이 있었다. 윤씨는 그래도 MBC나 인터넷언론은 그나마 예외여서 다행이었다고 덧붙였다.

국세청의 '삼성 봐주기'를 비판하며 1인시위를 벌이던 당시의 윤종훈 회계사
국세청의 '삼성 봐주기'를 비판하며 1인시위를 벌이던 당시의 윤종훈 회계사김수민
그는 이제 정치민주화 이상으로 경제민주화가 중대한 문제가 되었다고 밝히며, 복지를 통해 이루는 '출발의 평등'과 재벌황제경영의 타파, 이상 두가지의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 그는 박정희정권 때 국민의 세금으로 부를 쌓아놓고 이제는 세금을 못 내겠다고 하는 재벌을 성토하면서, 미국이 한심한 나라지만 부시 대통령이 상속세를 폐지하겠다고 했을 때 빌 게이츠 같은 부자들이 이를 반대했었음을 상기시켰다.

그는 이른바 개혁세력과 진보진영에게도 화살을 돌렸다. 윤종훈 회계사가 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가 부유세법안 등에 대한 지도부의 무책임한 자세를 비판하며 정책연구원직에서 사퇴한 것은 유명한 일화. 그는 사회양극화를 방기한 민주화세력의 무능과 오만을 지적하며 "변화를 꾀하지 않고 익숙한 것만 하려고 하니 마치 샤워하듯 데모나 하고 '국가보안법 폐지'처럼 했던 이야기를 반복할 뿐"이라고 했다.

""대학생 보수화? 사회생활하면 바뀔 것"

윤씨의 강연은 조세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며 '사회민주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그는 수입의 절반을 세금으로 내는 스웨덴 사회에서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10대에서 60대까지의 사람들이 어울리는 술집에 가서 즐겁게 술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과음을 하고 나서 길거리에서 구토를 했는데... 만약 한국 명동에서 동남아시아인이 그랬으면 욕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 사람들은 앰블런스를 부르겠다고 난리더라구요. 사실 우리는 그런 광경 흔하게 보잖아요? (웃음)"

그는 스웨덴에서의 경험을 '연대 정신'이라는 말로 요약하며 "어깨 넓은 사람이 마음이 넓다"고 비유했다.

스웨덴 기업 '발렌베리'를 한국 재벌들이 들먹이는 것도 웃기는 일이라고 했다. 발렌베리가 6대 세습을 했다는 것은 표면적인 현상이고, 일가가 아닌 재단이 지주경영을 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진면목을 삼성 등이 일부러 가리고 있다는 것이다.

윤씨는 1인시위를 하며 삼성에 맞서게 되면서 국세청장한테 시위를 했으니 공인회계사로서는 엄청난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러나 아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꼽혔다는 얘길 듣고, 행복한 삶을 산다는 생각을 했단다.

한편 요즘 20대가 40대보다 더 보수적이라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비관적으로만 보지는 않는다고 했다. 현재는 취업란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지만, 직장 생활을 하며 세상을 두루 경험하면 바뀔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는 끝으로 대학생들에게 "지식가치가 중시되는 세상에서 계속해서 시야를 좁힌 채 돈만 생각하는 것은 그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의견을 전하며 '창조적 발상'과 '이타적 본성'을 강조했다.

"옛날에도 데모를 하면 '공부하기 싫어서 그런다'고 하는 사람들 있었어요. 아니, 공부하기 싫다고 감옥에 갑니까? (웃음) 그런데 사실 이타적 본성은 자신이 즐겁게 사는 길입니다."

이번 강연은 연세학술네트워크(준)와 동아리연합회가 공동으로 주최했다. 연세학술네트워크는 학술모임 등 여러 학생들의 연계로 꾸려진 모임이고(지난 1월 '황우석신드롬, 부끄러운 자화상'(강양구, 한재각 출연) 강연회를 개최한 바 있다), 동아리연합회는 학내 중앙동아리들의 자치와 권익을 위해 만들어진 단체다.

행사를 준비했던 동아리연합회의 김세현(사회계열 1학년)씨는 "대학사회가 파편화되고 학생운동권마저 수동적인데, 이번 강연에서도 참여가 저조했다"고 아쉬워하면서도 "늘 섭외하던 분들의 비슷비슷한 강연이 아닌 전문화된 강연이 필요하고, 이번이 첫걸음이 될 것으로 믿는다"고 밝혔다. 실제로 연세대학교 학내에서 기존의 정치민주화를 다룬 강연회나 마르크스주의 등 전통적 좌파담론을 다룬 특강은 많았지만, 의외로 삼성 등 재벌경영을 겨누고 경제민주화를 설파하는 강연은 드물었었다.

강연에 참석한 권보경(전자공학과 2학년)씨는 "진지하고 치열하게 학창시절을 보낸 선배님의 강연이어서 좋았고 오늘날 점점 보수화되는 듯한 대학사회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며, "중간에 '세금을 많이 거두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힘들지 않을까 했지만, 그것이 어떻게 쓰이느냐에 관한 공감대가 형성되면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고 본다"고 했다.

"조세를 이슈화시켜야 한다"
윤종훈과 청중과의 1문1답

- 현재 한미 FTA 등으로 인해 양극화가 더욱 심화될 조짐인데 희망이 과연 있는가? 노무현 정권도 보수화되고 있다.
"물론 걱정스러운 측면이 많다. 그러나 80년대 대학다닐 때에는 이러한 세상이 온다는 것을 상상도 못했다. 대학가에 경찰이 상주하던 세상이었는데 이렇게 대통령 씹는 게 국민 스포츠가 될 날이 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웃음) 희망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현 집권세력이 보수적인 관리들과 토론하고 설득하는 데 무능하고 재경부 관리 출신의 인사를 영입하는 등의 행태는 비판받아야 한다."

- 열린우리당 뿐만 아니라 민주노동당도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문제를 풀어나가야 할까.
"세력이 커지고 지지도가 올라가면서 오만해졌다. 이제 다시 시작할 각오를 해야 한다. 나는 열린우리당이고 민주노동당이고 헤쳐모여를 해야 한다고 본다. 민주노동당이나 민주노총의 정파구도도 신념보다는 경험과 인맥으로 형성된 측면이 강하다. 나는 이제 사민주의적 신념과 비전이 있는 20~30명의 국회의원을 갖고 10년동안 싸워야 한다고 본다."

- 사민주의가 대안이라고 했는데 과연 궁극적인 비전이거나 현실적 방안이 될까.
"스웨덴하고 똑같이 하자는 말은 아니다. '사민주의적 방향'을 이야기한 것이다. 한국에는 한국 토양에 걸맞는 모델이 필요하다고 본다. 다만 '출발의 평등'을 온전히 구현할 수 있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 대안연대회의 등의 학자들 사이에서는 재벌개혁이나 소액주주운동이 결국 해외자본에 힘을 실어줘서 경제주권을 약화시킨다는 지적이 나오는데.
"소액주주운동이 한계를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해외자본 핑계를 드는 것은 '늑대가 더 나쁘냐, 여우가 더 나쁘냐'는 말을 하자는 것과 같다. 왜 둘 중에 한 편을 들어야 하는가. 심지어 해외자본 때문에 상속세도 폐지하자는 이야기를 하는데, 주식으로 세금을 내더라도 그게 국가로 가지 해외자본한테 가는가. '자본에 국적이 있는가'라는 주제 역시 분명하지도 않고 의미가 없으므로 '있다, 없다'로 답할 가치가 없는 질문이다. "

- 노무현 정부가 '증세론'을 꺼냈다가 도로 칼집에 집어넣었는데 어떻게 될 것 같은가.
"현 정부여당에도 사민주의적 성향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있으나 무능하고 포위되어 있으며 의지가 없기에 별 기대는 안 한다. 단, 조세를 이슈화하는 계기는 마련되었으면 좋겠다. 세금 확충은 단기적으로는 인기를 깎아내리는 정책이다. 그러나 세금을 확충하지 않으면 재정이 삭감된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걷기 위해 걷는 세금이 아니라 쓰기 위해 걷는 세금임이 부각되면, 장기적으로는 승산이 있을 것이다." / 김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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