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냄
'일탈의 유혹'이 강렬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 바로 옆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새벽같이 일어나 샤워를 하고, 밥을 먹고, 화장을 하고, 만원 전철에 끼어서 허겁지겁 회사로 향하는 우리네 일상도 사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정반대의 색채로 바뀔 수도 있다.
이를테면 내가 진정 원하기만 한다면 나도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그 남녀처럼 빌딩이 즐비한 시내 한복판을 오토바이로 시원하게 가로질러 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백 퍼센트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왜? 그것은 간단하다. 지금 내가 영위하고 있는 많은 것들, 내가 차지하고 있는 사회적 지위, 수입,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들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내일은 멀리 갈거야>는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는 한 커플의 영상과도 같은 이야기이다. 사랑에 모든 것을 거는 이즈미, 한 번 감정에 빠져들면 상대방에게 무섭게 집착하고 모든 것을 내어주게 된다. 그런 사랑이 지나갈 때마다 이즈미는 이별을 감당하지 못하고 일탈을 감행한다.
...노부테루가 나한테서 멀어져간다. 그런 생각을 하자 현실감이 점점 희박해졌다. 평형 감각마저 이상해졌다. 가스 요금을 내러 가서 아무 생각 없이 은행 봉투를 몇 장씩이나 들고 오는가 하면, 생리대를 사러 약국에 들렀다가 구취 제거용 알약을 훔쳐온 적도 있다. 역으로 가는 길을 잘못 들어 상행선과 하행선도 구별 못하게 되었다. 그런 상태를 위험하다고 느낀 사람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나 자신이 망가져 가는 공포를 나는 처음으로 느꼈다.
장소는 어디라도 좋았다. 노부테루한테서 멀리 떨어져 있을 수만 있다면. 보고 싶어져도 그 마음을 흘려보낼 수밖에 없을 만큼 먼 장소. 자전거가 아니라 롤러 블레이드여도 좋았고, 도보라도 상관없었다. 이제까지의 내가 해내지 못할 것 같았던 일이라면, 그리고 모두 끝난 후에 무언가를 극복했다는 기분이 들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좋았다...
이즈미는 이별로 망가져 가는 자신을 해소하기 위해 정처없이 떠나고, 떠난 곳에서 다시 사랑을 시작하게 된다. 역시 같은 패턴으로 사랑하게 되고, 다시 이별하게 되는 이즈미. 그리고 다시 떠나고, 다시 사랑하고. 나중에는 떠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어 섹스와 마약에도 탐닉하게 된다.
사랑에 집착하는 한 여성이 '만나고 헤어지고'를 반복하면서 이별을 감당해내기 위해 마약과 섹스에 탐닉해간다는 이야기가 왜 독자에게는 맑고 시원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이즈미가 생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즈미가 '미래'라는 불확실한 영역에 전혀 시선을 주지 않고 현재의 삶에 모든 것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이즈미에게는 항상 현재만이 있다. 현재 먹을 것, 현재 사랑할 것, 현재 즐길 것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그것이 없을 때는 없다는 것을 잊을 수 있는 다른 방편, 예를 들면 여행 같은 것을 도모하면 되는 것이다. 얼마나 간단한가.
만일 '미래에 대한 염려'라는 부분만 인간의 뇌리에서 떼어내 버린다면 인간은 누구나 이즈미처럼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그로 인해 지금보다도 훨씬 더 다채롭고 재미있는 인생을 펼쳐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일에 대한 걱정이 없다면, 당장이라도 머리를 물들이고 오토바이를 잡아타고 거리로 나아가지 못할 이유가 달리 있겠는가.
쿨하고 미련 없는 젊은이의 연애사를 그린 이 책은 전형적인 일본의 트렌디 소설이다. 청결하고 세련된 문장들이 단번에 요시모토 바나나, 에쿠니 가오리, 무라카미 하루키 등 일본의 대표작가군을 떠올리게 한다. 쇳조각 같은 일상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사람에게 이 책을 내밀고 싶다. 톡 쏘는 콜라 같은 청량감을 선사할 것이다.
내일은 멀리 갈 거야
가쿠다 미츠요 지음, 신유희 옮김,
해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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