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원
사람들은 농촌이나 시골하면 자연을 떠올리지만 20여년을 그곳에서 자란 나는 과연 시골이 그렇게 자연과 친화적인 곳인가 하는 의문이 들곤 한다.
호젓한 산골짜기에서 마주친 산토끼는 항상 나를 보자마자 줄행랑을 놓았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산책을 하고 있는데도 새들은 내가 인기척을 보이면 곧바로 그 즐겁던 노래를 접었다. 내 기억에 의하면 그렇게 자연은 항상 나를 경계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자연과 아주 친하게 지낸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은 어릴 적 우리 집에서 키우던 까치 한마리가 내게 남겨준 것이다. 그 까치가 어떻게 우리 집에서 자라게 되었는지는 나도 기억이 흐릿하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할머니가 그 까치를 어렸을 적부터 집에서 키웠다고 했다.
어찌나 사람을 졸졸 따랐던지 결국은 어느 해 가을, 참깨를 털기 위해 휘두르던 도리깨에 맞아 죽고 말았다. 자연에서 자란 까치였다면 절대로 그렇게 사람 가까이 날아들었을 리가 없다.
생각해보니 자연에서 자란 것들은 자연을 편하게 생각하고 자연과 아주 친하게 지내는 것 같다. 그와 달리 사람의 품에서 자란 것들은 사람과 아주 친해진다. 그 까치가 그랬다. 시골 살 때, 자연은 그냥 자연의 몫이었다. 그래서 그곳에선 자연이 자연을 키웠다. 산토끼나 산돼지, 참새, 까치, 그 모두가 자연의 품에서 자랐다. 그 때문인지 인간 가까이 오려고 하질 않았다.
도시에 와보니 시골에 있을 때보다 꽃을 키우는 사람이 더 많고 또 애완동물을 키우는 사람도 훨씬 많다. 자연의 몫을 사람이 떠맡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하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도시에서 꽃과 동물들의 생명이 남아날 리가 없을 것 같다. 도시 사람들은 암암리에 자연의 상실에 시달린다. 아마도 그 상실감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스스로 자연이 되고 싶은가 보다.
사슴과의 대화
어제(6월 17일)는 서울숲에 있었다. 그곳에 사슴이 있었다. 자연이 키우던 사슴을 인간이 키우고 있었다. 도시에선 참 살기가 어렵다. 인간이 인간으로 살면서 또 자연이기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골 살 때, 그냥 따로 떨어져 제 각각 살았던 것이 인간과 자연이었다면 이제 도시에선 인간을 고리로 자연과 인간이 공존의 풍경을 엮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창살 속에 갇혀 있었더라면 측은함이 컸겠지만 그래도 넓은 공원을 뛰어다니며 사람과 친하게 지내고 있는 사슴을 보니 다소 마음의 위안이 되고 또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