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다가 한 여성 운전자의 차에 관한 애로사항을 해결해주고 있는 김영완씨오창경
그날도 저는 보험 회사에 전화를 할까, 동네 사람들을 부를까 잠시 고민을 하던 찰나였습니다. 그런데 마을 입구에서 우체부의 오토바이가 눈에 띄는 것이었습니다. 작년 가을 '농기계를 고쳐주는 맥가이버 우체부'로 내가 <오마이뉴스>에 소개한 적이 있는 김영완 씨가 길을 재촉하고 있었습니다.
그날도 그는 어디선가 고장 난 이앙기라도 손을 봐주고 가던 길이었는지 퇴근 시간도 훨씬 지난 그 시간까지 우편배달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내가 그를 부르며 손짓을 했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는지 그는 동네 모퉁이를 돌아 곧 내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휴대 전화에 입력된 그의 번호를 눌렀습니다.
머지않아 그가 우리 시야에 다시 나타서는 익숙한 손길로 트렁크를 열고는 스페어타이어를 꺼내고 차를 들어 올리는 자키를 찾았습니다.
"차를 들어 올려야 하는데 자키가 안보이네요."
"글쎄요… 모르겠네요."
'기계치'에 가까운 내가 그런 것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김영완 씨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조금 떨어진 곳에 주차되어 있던 마을 사람의 차로 가더니 자키와 연장들을 빌려와서는 펑크 난 바퀴를 떼어 내고는 스페어타이어로 갈아 놓았습니다.
작년, 그의 이야기가 실린 기사가 인터넷에 뜬 이후, 그는 한마디로 '떴다'고 했습니다. 시골 마을 우체부인 그에게 쏟아지는 각 언론사들의 취재요청으로 그는 정신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런 여세를 몰아 그는 정보통신부장관상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그 후로 내성적이고 표현력 없는 그는 우리집에 우편물을 배달하러 올 때마다 고마움을 표시하려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저는 그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일부러 한동안은 우편물마저도 직접 받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항상 누군가의 신세를 지고 살고, 때로는 큰 도움도 받으며 살기 마련입니다. 누군가에게서 도움을 받았다고 해서 금방 그 신세를 갚지 못해서 안달하는 것도 좋은 성격은 아니지만 그 신세를 내세워 공치사를 하는 모습은 더 아름답지 못한 법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도움을 줄 땐 곧 돌려받을 것을 염두에 두고 신세를 진 사람은 곧 갚아야 한다는 부담에 시달립니다.
'신세 지기와 갚기' 굴레에서 벗어나다
김영완씨와 저 역시 이런 '신세 지기와 갚기'의 관계 때문에 그동안 서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저는 정말로 김영완씨에게 '덕분에 떴다는 말과 고맙다'는 전화 한통으로 만족했지만 그는 명절에 민속주를 한 병을 사들고 찾아 왔더군요. 내가 안 받을까봐 그랬는지, 그도 좀 쑥스러웠는지, 별 말도 없이 우리집 현관문에 그것을 쓰윽 밀어 넣어 놓고는 말도 없이 가버리더군요.
"앞바퀴 타이어들이 안쪽만 닳았네요. 이런 경우는 휠얼라인먼트를 손봐야 하거든요."
"고맙습니다. 저도 드디어 우리 동네 맥가이버 우체부의 혜택을 보게 됐군요. 어차피 새 타이어로 갈아야 하니까 카센터에 가서 한꺼번에 손을 봐야죠."
저는 과감하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로 입을 닦을 생각입니다. 그런 일로 '신세지기와 갚기'의 굴레에 너무 묶여버리면 오히려 인간관계가 소원해질 수도 있으니까요. 사람은 어차피 누군가를 도와주기도 하고 도움을 받기도 하는 존재들이므로 너무 부담스러워할 필요도 없고 생색을 내고 스스로 공치사를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도움을 받은 일은 쉽게 잊어먹어도 도움을 준 일은 기억하는 이상한 뇌구조를 가졌더군요. 저 역시 펑크 난 자동차 바퀴 때문에 곤란했던 그 상황에서 김영완씨가 지나가는 것을 본 순간, 신세를 져도 부담스럽지 않을 사람이라는 생각부터 퍼뜩 떠올랐던 것은 내가 그에게 도움을 줬던 사실만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저는 다시 한 동안은 그와 마주치는 시간을 피할 것입니다. 그러는 편이 그와 나의 인간관계에서 더 자유로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외출했다가 돌아와 보니 현관 앞에 쌓인 우편물 속에는 지난 지방 선거의 당선자와 낙선자들의 판에 박힌 인사장들이 있었습니다. 공치사와 공약이 난무했던 한바탕 선거를 끝낸 인사장의 이면에는 '말'만으로는 끝나지 않는 논공행상(論功行賞)으로 여러 사람들이 주고받게 될 상처부터 엿보이더군요.
사람이 살다 보면 신세를 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돕고 사는 것이라 여기며 때로는 과감하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 한 마디'만으로 인사치레를 끝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지혜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김영완씨는 저와 그런 생각이 통했는지 요즘 눈인사마저 할 틈도 주지 않고 우리집을 빠져 나가거나 우리가 외출한 사이에 다녀가곤 합니다.
덧붙이는 글 | 전원주택 라이프 7월호에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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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의 시골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조근조근하게 낮은 목소리로 재미있는 시골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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