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견문록>푸른숲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성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일까? '마흔 셋'이라는 나이는 이미 확보된 둥지를 박차고 나가기 쉽지 않은 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일'을 찾아 과감히 도전하는 '한비야'는 나 같은 소시민과는 분명 다른 사람이다.
여러 매체에 통해 그녀의 이름이 오르내려도 나와는 별개의 사람으로 간주해서인지 그녀의 책 또한 가까이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손에 닿아 있었기에 읽게 된 '중국견문록'. 책장을 넘길 수록 성실한 그녀의 삶에서 반듯함을 느끼고 있는 중, 나의 친구 또한 그 책을 읽고 있는 걸 알았다.
중국어를 공부하고 있는 친구는 이 책이 제 마음에 '밑줄 쫙쫙' 그어주어 준다며 매일 내게 전화를 해 단락 단락을 집어가며 이야기를 했다.
어느 날, 친구는 자못 낮은 소리로 전화를 했다. 이번 여름에 아이들 방학을 이용해 캐나다에 있는 친구 집에 같이 다녀오자는 것이다. 한번도 해외를 나가 본적 없이 언제나 집안에만 박혀 있는 친구의 말은 내게 충격적이었다.
무엇이 그녀를 변하게 한 것일까. 변해도 너무 많이 화끈하게 변한 나의 친구가 은근히 불안하기까지 한데 친구가 내게 토로한다.
'한비야'를 통해 '좁게 갇혀진 울타리만을 전부라고 여겼던 아니 그런 의식조차 없이 살아 온 것이 안타깝다'고. '보고 싶은 친구 한번 만나보는 게 그리 힘든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고.
'꿈은 이루어진다' 라는 확신을 갖게 하는 에너지로 친구에게 일격을 가하는 '바람의 딸' 한비야의 위력은 어디서 온 것일까. 내 나름대로 그녀의 장점을 제시해 본다.
첫째, 그녀의 글은 구어체에 가깝다. 책을 가까이 하지 않던 사람도 그녀의 책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는 것. 책의 내용과 별개로 그녀만이 가지는 솔직 담백한 심성들이 직접 화법으로 명쾌하게 살아 다가온다. 그녀의 글쓰기를 모방하고 싶을 정도이다.
자전거를 잃어버린 뒤 '씩씩거리며 만나기만 해 봐라'라며 자전거 사냥에 나선 그녀의 모습이 코믹한 영화를 보듯 실감난다. 이러한 재미 때문에 나의 친구는 화장실 갈 때도 그 책을 챙긴다고 했다. 글이 글로 느껴지기보다는 바로 옆에서 이야기 해 주는 듯 살갑고 친절한 글쓰기가 나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듯 특별한 친밀감을 만든다.
둘째, 그녀의 생생한 경험담은 우리의 좁은 눈을 뜨게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넓기도 하고 좁기도 하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새삼 다시 느끼게 된다. 중국 체류 중에도 케냐와 캄보디아의 긴급구호 활동을 하는 그녀를 대하면서 울타리 안에서만 안주하고 있는 내 모습이 초라했다.
케냐의 오지에서 물이 없어 죽어 가는 생명들을 구하기 위한 그녀의 목소리 '우리 더 이상 무엇을 망설일 것인가'라고 맺는 문장과 남은 책장의 흰 여백이 나의 깨침을 말없이 받아주는 그녀의 넓고 하얀 마음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실화? 하나를 소개하자. '조선족 주최 청년 친목회'에 한국, 북한동포 ,러시아의 고려인. 중국 동포와 함께 참여했다. 그녀가 '혼자 듣고 있기는 아까울 정도로 재미있어 소개하는' 대화의 한 부분.
북한 사람: "공부가 세게 바쁘단 말입니다." (공부가 아주 힘듭니다)
중국동포: "우리 나그네는 골이 아주 비상하기요." (우리 남편은 아주 머리가 좋지요)
북한 사람: "다음에는 반드시 지각 소멸을 해야 합네다." (지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북한 사람: "북경에서 밤에 혼자 다니기가 으쓸하디요?" (무섭고 싫지요?)
중국 동포: "그래, 나그네랑 동무해서 일없습네다." (남편이랑 같이 다녀서 괜찮습니다)
중국 동포 : "까마치를 어로스에서는 메라고 합네까?" (누룽지를 러시아에서는 뭐라고 부릅니까?)
고려인: "까만밥이라고 합네다."
그녀의 이렇듯 소중한 경험들은 보고 싶어하는 것들만 보는 내 눈을 보다 넓고 멀리 보게 만든다.
셋째, 마음먹으면 해낼 수 있는 의지력을 전염시킨다. 처음 접하는 중국어를 1년 안에 일상 회화를 불편 없이 할 수 있고, 중국 신문과 테레비젼을 60%로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 보더라도 그녀는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녀가 말하는 건 아주 단순하다. 제 페이스대로 가는 것이다. 남들과 같은 발걸음의 속도로 사는 것이 아닌 제 속도에 맞춰 느리지만 꾸준히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 나아가는 것조차 가늠이 안 되지만 그래도 걸어가는 것. 하고 있다는 것에 의지하며 성실히 조금씩 해 내는 것. 비법 아닌 비법이 그녀의 중국어 성공기이다.
나도 아이를 영어학원에 보내기 보다 아이와 함께 같이 공부해야겠다는 작심삼일의 중대사? 를 마음먹는다.
"완벽한 지도를 가져야 길을 떠날 수 있는 건 아니다"라는 그녀의 주장을 되새기게 된다. 현실에 발목 잡혀 있어 '한계'라고 규정짓는 것들을 '가능성'으로 바꾸어 주는 힘, 그녀를 통해 지구촌 곳곳에 처한 어려운 상황들이 별개의 세상이 아님을 깨닫는다. 내가 아닌 국가적 차원의 도움도 중요하지만 나부터 달라져야 다른 부분들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도 다시 배운다.
지금 '긴급구호 활동가'의 '한비야'를 보며 예전에 읽었던 안네의 마지막 날짜의 일기가 생각난다.
"내가 이상을 버리지 않는 이유는 인간은 결국 선하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혼란과 불행과 죽음 위에 내 희망을 쌓아 올릴 수는 없습니다. 나는 세계가 차츰 황폐해 가는 것을 보고 수백만의 고통을 직접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늘을 보면 언젠가는 모든 일이 다 잘 되고 이 잔악함도 결말이 나고, 또 다시 평화와 고요가 돌아오리라고 믿습니다. 그때까지는 이상을 잃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어쩌면 정말 그것들을 실현 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르니까요."
세상은 희망과 바람과 그 믿음을 실천하는 사람들 때문에 극악한 환경도 다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한비야' 같은 이들이 안네가 바라던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는 선한 이 일 것이다.
엊그제 친구는 항공권을 예약했다고 한다. 마흔이 다 돼서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는 그녀는 요즘 무척 들떠 있다. 희망하는 것을 마침내 실행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준 이 책은 나의 친구에게 더 할 수 없는 값진 선물이었다.
한비야의 중국견문록
한비야 지음,
푸른숲,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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