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자박스야, 내 마음까지 전해다오!

부모님께 받은 아이스박스에 과자를 넣어 보냅니다

등록 2006.06.22 15:21수정 2006.06.22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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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드실 과자들
아버지 드실 과자들주경심
"엄마 저거는 왜 안 버려요?"


김치냉장고 위에 올려진 커다란 아이스박스를 가리키며 큰아이는 왜 버리지 않느냐고 두 번 세 번 되물어온다.

"그건 쓰레기 아니야!"
"쓰레기가 아니면 뭐야? 아무것도 안 들어 있잖아!"
"할머니 집에 도로 보내 드려야지!"

보내야지, 보내야지 하면서 못 보낸 지가 두어 달이 훌쩍 넘어간다. 그 와중에 친정엄마는 객지 사는 딸네에 또 하나의 박스를 보내와서 한 개도 아닌 두 개의 박스가 언제 오냐고 묻는 아버지에게 시원한 대답 한번 못한 내 맘처럼 그렇게 쌓여 있다.

받을 때는 박스가 터질 듯 들어 있는 해산물이며 김치가 반가워, 몇 날을 안 먹고 모아서 딸에게 부치는 엄마의 마음 같은 건 헤아리지도 못했는데, 언제 그런 것들이 왔냐는 듯 텅 빈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박스가 걱정 아닌 걱정거리로 전락을 해 버린 것이다.

8년 전 결혼을 하고 난 뒤 친정에서는 한 달에 한 번, 적어도 두 달에 한 번은 온갖 찬거리가 든 박스를 보내셨다.


그러니 나는 친정 잘 둔 덕에 발품을 팔아가며 시장을 돌아 고춧가루, 참기름, 마늘, 고구마까지 산지와 품질을 따져가며 쌈짓돈을 꺼내야 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해산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남편은 집에만 오면 철 따라 올라오는 삼치회에 갑오징어, 새우, 꽃게에 돈 주고도 못 사먹는 국파래 된장국에, 군소, 비말무침까지 진수성찬이 부럽지 않은 밥상이 기다리고 있으니 어찌 집으로 오는 발걸음이 솜털처럼 가볍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사위의 식성을 알기에 오죽하면 이제는 친정 부모님조차 박스를 보낼 때면 돌게나, 전복은 "김 서방 줘라!"며 못을 박기도 하신다. 그렇게 보내온 박스는 대부분 그 주 안으로 다시 시골로 부쳐지곤 했다.


고향은 산 넘고, 바다 건너 하룻길로는 감히 찾아갈 엄두도 나지 않는 오지낙도로 자연이 주는 것들 외에는 모두가 귀한 곳이 그 곳이다. 도시에서 하찮게 버리는 유모차도 그곳에서는 할머니들의 길동무가 되어주고, 무심히 버리는 검정봉지 하나도 그곳에서는 없어서 못쓰는 귀물이다.

친정 부모님은 '파스'라도 한 장 사려면 고갯마루를 허위허위 넘어가야만 하고, 모든 제품의 가격은 겉포장지에 표시된 가격이 그대로 공정하게 적용이 된다. 마늘 한 접에 반 접이 덤이지만 공산품만은 제 아무리 허물없는 사이라도 절대 세일도 덤도 없다. 그러니 해산물이 담겨 온 박스 안에는 흔히들 말하는 공산품이 담겨 도로 고향집으로 되돌아간다.

그런데 이번에는 석 달이 넘도록 박스가 고향집으로 되돌아가지를 못했다. 저녁마다 아버지의 안부를 묻기 위해 거는 전화가 요 며칠은 유난히도 무거웠다.

팥빙수 재료들
팥빙수 재료들주경심
"아버지 과자 없지요?"
"아니다. 전번에 니가 사보낸 과자가 아적도 작은방에 태산이다!"

딸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아버지는 애써 마른입술을 적시며 거짓말을 해오셨다.

"사서 보내야 하는데, 죄송해요!"
"과자는 안 묵어도 사는 것이다. 긍께 신경 쓰지 말고 있어라. 난중에 건이 아범 돈 많이 벌거든 그때 가서 많이 사주믄 되지야."

그 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제는 오랜만에 작은 아이를 이끌어 마트에 갔다. 그리고는 쇼핑카트가 넘치도록 과자를 담고 또 담았다. 저 먹으라고 사는 줄 알고 작은 아이는 기분이 좋아 발을 동동거렸지만 이건 '언제 오냐고, 보고 싶다'고 저녁마다 물어오는 아버지에게 자주 찾아뵙지도 못하는 딸의 마음까지 전할 막중한 임무를 띤 과자란 걸 딸은 모르는 모양이다. 물론, 입던 옷도 훌훌 벗어던지는 이 여름에 건이 아범의 옷장사가 잘된 것도 아니다.

우는 아이 젖 준다고 했던가? 생활에 여유가 없고, 언제나 돈을 좇아 달음박질치며 산다고 말하면서도 당장 눈앞에서 칭얼대는 아이들에게는 떡이며, 과일을 큰 부담 갖지 않고도 사서 먹이면서도 눈앞에 안 보이는 아버지의 과자는 언제나 다음으로 미뤄왔던 것이다. "딸 아니면 세상에 웃을 일 하나 없다"는 그 퍽퍽한 아버지는 딸이 사서 보낸 과자 몇 봉에 두 달이고, 석 달이고 입을 귀에 걸고 다니시며 행복해 하실텐데 말이다.

내일이면 박스는 고향마당에 펼쳐질 것이다. 그리고 물젖은 장화를 벗을 새도 없이 바다로, 들로 뛰어다니시는 내 아버지는 오랜만에 만사 제쳐두고 양지쪽에 자리를 펴고 앉으셔서는 소풍가는 아이마냥 어느 과자를 먼저 먹을지 고심을 하느라 해가 서산을 넘는 줄도 모르실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이제야 사람도리 하는 것 같아 가슴이 훈훈해져 온다.

그리고 몇 만 원의 과자만으로도 "우리 딸이 시상에서 최고!"라며 잘 펴지지도 않는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시는 내 아버지에게 앞으로는 내리사랑만큼이나 치사랑도 배우면서 더 착한 딸, 더 좋은 딸이 되겠다고 감히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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