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헬렌 피셔는 거침없이 풀어내는 글 솜씨로 여러 권의 책을 낸 여류 인류학자이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책으로는 94년 <성의 계약> 99년 <제1의 성> 2005년 <왜 우리는 사랑에 빠지는가>가 있다.
<성의 계약>은 부제목으로 '인간의 진화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달고 있다. 인류학자답게 인간의 진화를 시기별로 살피면서 헬렌 피셔 특유의 거침없는 필치로 부분 부분을 소설적으로 재구성하여 넓게는 인류의 기원, 작게는 인간의 암컷이 인류의 진화에 어떻게 기여를 해왔는지에 대하여 흥미 있게 이야기 해준다.
그러나 인류학이라는 거창한 학문에 기죽을 필요는 전혀 없다.
“당신은 대단한 부자인가? 아니면 유능한 커리어우먼인가? 학교에서 촉망받는 수재인가? 하지만 그런 것은 자연계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당신에게 아이가 있고, 그 아이가 잘 자라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자연계에서 ‘적응한’ 존재이다. 당신의 유전자는 다음 세대로 이어질 것이며, 적자생존이라는 의미에서 당신은 승리자이다.”
이런 서두로 시작하는 이 책은 현생 인류를 호모사피엔스라 부른다는 정도밖에 모르는 나 같은 사람도 재미있게 술술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갑자기 받는다면? “두뇌와 양손을 사용하여 도구를 만들고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헬렌 피셔류의 대답을 한다면 이렇다.
“언제라도 짝짓기가 가능하고 배우관계를 맺는 기묘한 동물”이라고.
모든 동물들은 예외 없이 발정기가 있는데 반해 인간의 암컷만은 유독 발정기가 따로 없다. 연중 언제라도 짝짓기가 가능하고, 수태 시기가 언제인지 알 수 없는 '침묵의 배란'으로 바뀌고, 발정기를 표시하던 엉덩이가 가슴으로 옮겨가 젖가슴이 생기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된 기원을 약 천만 년 전 인간계통의 최초 친류인 프로토호미니드에서부터 찾기 시작한다.
지구의 급격한 기온 저하로 프로토호미니드는 깊은 숲 속에서 사방이 초지로 트인 소개림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안전을 위해 집단의 결속이 필요하였고, 음식물을 찾으면 안전하게 먹기 위해 모두가 있는 곳으로 가져오게 되는데, 물건을 운반하기 위해서 자연히 두발로 걷는 것이 선택되었다.
이와 더불어 골반도 현대인과 같은 형태로 변화하기 시작하면서 골반의 입구가 좁아져 갔다. 프로토호미니드의 암컷들은 출산이 점점 어려워져 난산이나 생명을 잃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였다. 따라서 ‘미숙아를 출산하라’는 유전적 명령이 프로토호미니드의 암컷들 사이에 퍼져나가게 됨에 따라 아이를 양육하고 보호하기 위한 시간들이 보다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아이가 딸린 어미는 하루 종일 동료들과 함께 이동하고, 사냥에 참가하고 식물성 먹이를 찾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니 어미의 힘만으로 아이를 기르기 어려워져 수컷의 도움이 필요해졌다.
매달 발정 주기마다 다른 암컷보다 오랫동안 임신해서도 늦게까지, 출산 후 보다 빨리 짝짓기를 재개할 수 있는 암컷들이 수컷들의 관심을 더 끌게 되어 먹이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짝짓기를 언제라도 할 수 있게 하는 유전적 특질이 보다 많이 전해지면서 프로토호미니드의 암컷에게서 발정기가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됨으로 해서 암컷은 점점 빈번하게 아이를 낳게 되고 수컷의 도움이 점점 더 필요하게 되었다.
암컷은 짝짓기와 식물먹이를 제공하고 수컷에게서는 고기와 보호를 받는 부부관계를 맺게 되고 그 기간이 보다 길어지는 경향을 띄게 된다. 보다 인간계통에 가까운 호미니드가 등장한 400만년 전, 초기의 남자와 여자 사이에 '성의 계약'이 성립되었고, '일부일처제'가 성립되게 된 것이다.
고도 산업사회인 현대에도 여전히 우리의 선조들이 맺은 계약은 지속되고 있다. 회교권의 몇몇 나라를 빼고는 대부분이 일부일처제를 법으로 정하고 있다. 아득하게 먼 옛날의 선조가 살았던 시절과 지금의 환경은 너무나 틀리듯, 계약의 목적과 내용은 변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라건대 그 변화가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고 고양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기를.
덧붙이는 글 | 도서명 : 성의 계약
지은이 : 헬렌 피셔
출판사 : 정신세계사
성의 계약
헬렌 피셔 지음, 박매영 옮김,
정신세계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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