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말 아편을 피우는 아편흡연방이다. 샤오제(종업원)가 다리를 주무르고 있고 중독자들은 피골이 상접한 상태로 아편을 빨고 있다.유창하
먼저 중국 상하이의 먼 과거를 알 필요가 있다. 상하이는 5∼7세기까지만 해도 작은 어촌에 불과 했다. 그래서 상하이를 지칭하는 별도 호칭으로 현재까지 '후(호)'라고 사용한다(후는 원시적 어업행위 사용 어구).
어촌에 불과하던 땅이 송나라 시대(960∼1126)에 이르러 비로소 상하이라는 지명을 사용하기 시작하며 13세기말 원나라 시대에 와서 장쑤성(江蘇省)의 한 구로 승격한다.
이후 명나라 시대(1368∼1644)에 들어와서 챵장(長江)의 삼각주 하구라는 지리적 조건으로 면 경작지가 생겨나고 목화재배기술이 발달하여 포목상들이 생겨난다. 명나라 때 발달한 면직물은 청나라(1644∼1911) 18세기 중엽까지 이어지며 차, 도자기, 향료, 비단과 함께 외국과의 물물교환 주요 품목에 들어간다.
1825년 당시 중국에는 아편중독자가 무려 1백만 명 가량에 이를 정도로 중독자가 많았다. 이들에게 아편을 공급하는 상인들은 영국 상인들이었는데, 아편거래를 하던 중 영국 상인들이 아편대금인 중국 은화(銀貨)를 인도로 유출한 사건이 생겼다.
이 말을 들은 당시 청나라 황제 도광제(道光帝)는 전격적으로 영국 상인과의 아편무역 중단을 선언하며 상인들을 체포하고, 창고에 쌓여 있던 생아편을 모두 바다에다 폐기 처분해 버린다.
그러나 이 조치는 약소국 침략을 일삼던 대영제국의 노여움을 불러오고 이른바 아편전쟁을 일으키는 구실이 된다. 영국은 1842년 6월에 황푸강(黃浦江) 입구 우쑹(吳松)에 군함을 진주시켜 함포 사격을 가하며 점령하면서 무능한 청나라 조정에 치명상을 입힌다.
이렇게 시작된 아편전쟁은 우쑹을 지키던 군병과 민간인의 죽음을 무릅쓴 처절한 저항을 받지만 '화력 차이'로 중국의 참담한 참패로 끝나고, 난징조약 체결로 이어져 상하이를 조차지역으로 내어주게 한다.
서구 열강들의 '내 땅 선긋기 놀이'로 전락한 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