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산골 분교 사람들이 참 좋더라"

15년간 산골 분교를 찾아 다닌 사진가 강재훈

등록 2006.06.28 17:18수정 2006.06.29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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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사의 기자 생활을 하면서 산골 분교 운동회를 찾아다니기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주어진 시간의 부자유, 그 이유로 사진 작업이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도와 강원도에 국한된 것이 좀 안타까운 부분이다. 하지만 무작정 시간을 탓할 수만은 없는 일, 올해 못 가면 다음 해 가면 된다는 각오로 시간과 기회가 닿을 때마다 산골 분교로 달려갔다. 가는 길이 멀면 밤새 달려 새벽에 도착했고 돌아오는 길이 멀면 아예 새벽길을 달려 서울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한 번 인연을 맺은 분교들은 몇 해 거듭해 찾아가니 자연히 아이들은 물론 지역 주민들과도 친해졌다. 사진을 찍다 말고 손님 찾아 달리기에 호명되어 아이들과 함께 뛰기도 하고, 부모가 오지 못한 아이가 있을 때는 대신 그 아이의 부모가 되어 발 묶고 달리기도 해야 했다. 내가 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먼저 나를 포함시킨 채 운동회를 진행하는 것이었다. 산골 분교 운동회는 그렇게 한 사람이라도 더 함께 하기를 말없이 원하고 있었으며 부르지 않았어도 찾아온 사람에게는 이웃처럼 반갑게 곁을 내주었다.


운동회를 마치고 마을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느티나무 아래 걸터앉아 나누는 막걸리.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는 것도 잊은 채 나누는 그 술잔에는 그들이 미처 토해내지 못한 가슴 속 산골아이의 응어리들이 담겨져 내게 왔다. 나는 그런 산골 분교의 사람들이 참 좋았다."
- 강재훈 사진집 <산골 분교 운동회>에서, 가각본


a 고 임길택 선생의 시와 강재훈씨의 사진으로 엮은 <산골아이>

고 임길택 선생의 시와 강재훈씨의 사진으로 엮은 <산골아이> ⓒ 보리출판사

몇 년 전이었다. 1년 동안 한 달에 한 번씩 이 나라 여기저기 분교를 찾아다녔었다. 학교 통폐합 정책 때문에 작은 학교들은 죄다 문을 닫게 될 거라는 소식을 듣고, 소중한 것들이 사라지기 전에 그 곳에 살고 있는 아이들을 만나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금산으로, 태백으로, 여주로, 무주로, 단양으로 참 여러 곳의 학교를 만났다. 어떤 때는 선생님 주무시는 관사 방을 빌어서 자기도 하고, 귀농한 젊은 부부의 곁방에서 머무르기도 했고, 어떤 때는 배추농사 지으시는 학부모님 댁에서 신세를 지기도 했다.

그러면서 '강/재/훈'이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되었다. 분교 아이들의 일상을, 분교를 품고 있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아 놓은 <들꽃 피는 학교>는 분교를 찾는 나에게는 교과서 같은 책이었다.

마을 한가운데 예쁘게 자리했던 학교가 아이들의 소란스러움을 뒤로 하고 하나씩 둘씩 사라져 가는 모습을 확인하는 것은 뭐라 말할 수 없이 쓸쓸한 일이었다. 그나마 학교가 있어서 늙은이들만 모여 사는 귀신같은 동네가 재잘재잘 살만하다고 하시던 할머니들의 바람과는 아랑곳없이 교육부의 폐교 조치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내가 다녀온 모든 학교는 지금 더 이상 '학교'가 아니라 화가들의 작업실로, 기독교단체의 수련회장으로, 천연염색하는 이의 작업장으로 탈바꿈된 뒤다.


"나는 산골 분교의 사람들이 참 좋았다"

그 학교들의 이야기는 이제 사진으로만 남았다. 강재훈의 사진을 보면서 나는 때때로, 이 사람의 마음결은 분명히 나와 비슷할 거라고, 그이의 시선을 닮고 싶다고, 배우고 싶다고 생각했다.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임길택 선생님의 유고 시집을 진행하게 되었다. 병상에 누워 돌아가시기 전까지 임길택 선생님은 아내의 손을 빌어 학교에서 만난 아이들의 이야기를 썼고, 그 시들을 모아 시집을 펴내면서 강재훈의 사진을 함께 싣게 되었다.


슬프고도 처연한, 밝지 않은 시들인데도 놀라운 희망을 품고 있는 임길택의 시들은 강재훈의 사진과 참으로 잘 어울렸다. 강재훈 선생도 흔쾌히 자기 사진을 이 시집에 실을 수 있게 허락했다. 시집 <산골 아이>는 그렇게 태어났고, 덕분에 강재훈이라는 '사람'을 나는 새롭게 알 수 있게 되었다.

<산골 아이> 시집을 내고 강원도에 있는 임길택 선생의 무덤 앞에서 가까운 분들을 모시고 간단한 출판 기념회를 가졌다. 사진을 보탠 강재훈도 함께였다. 얼굴도 본 적 없는 임길택을 마음 깊이 사랑하게 된 강재훈은 두 아이와 아내까지 데리고 왔다. 발이 묻힐 만큼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이었다.

무덤 앞에 시집을 바치고, 꽃을 올리고, 벗들의 목소리로 당신의 시를 읽어 드렸다. 모든 사람들의 머리에 눈은 내리고, 쌓이고, 녹아 흘러내렸다. 눈물과 함께 흘러내리는 눈 녹은 물이 사람들 안에 그리움으로 고였다.

그리고 그 곳에서 강재훈의 눈물을 보았다. 살아서 만나지 못한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른다고, 좋은 시에 당신 사진이 혹 걸림돌이 되는 것이나 아닌지 걱정이라고……. 본 적 없는 이의 무덤 앞에서 눈물 흘리는 '어른 남자'를 보는 것은,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어쩌랴, 그런 사람이 바로 강재훈이었다. 신문사 기자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여린 눈빛을 지닌 사람이었다.

어쩌다 통화라도 하게 되면 "막걸리 한 잔 해야지?" 하며 사람 좋게 웃는 강재훈의 인간적인 매력에 빠지지 않을 재간이 없다. 분교 취재를 다니는 동안 만난 마을 사람들이 스스럼없이 전화를 걸어 "형님! 동네에 상이 났는데 상여 맬 사람이 없네, 안 내려 올랍니까?" 청할 수 있을 만큼 편한 사람이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초등학생 때 강재훈의 카메라 앞에 섰던 녀석들이 수염 거뭇한 고등학생이 된 뒤에도 그이가 마을에 왔다고 하면 핸드폰으로 저희들끼리 전화를 해서 강재훈을 보겠다고 뛰어온다고 했다.

취재원과 취재 기자의 관계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과 사람'의 사귐으로 명확히 정돈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이를 만나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말이다. 한겨레신문을 보다가 '와, 이 사진 좋은데?' 하고 찍은 이의 이름을 일부러 찾아보면 대개가 '강재훈'의 이름을 만나게 된다. 아무래도 강재훈의 마음결에 전염이 되어 버린 모양이다, 나는.

그리고 강재훈의 분교 사진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살인적인 신문사의 취재 스케줄을 소화하면서도 틈만 나면 분교들을 찾고 있었다. 눈이 고운 아내와 아버지를 꼭 빼닮은 두 아이가 아버지의 부재에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고 넌지시 물어 본 적이 있다. 걱정 없다고 했다.

아버지가 사진을 찍을 때 아들 역시 곁에서 카메라를 가지고 놀았고, 아내와 딸도 기꺼이 강재훈의 분교 나들이에 동참한다고 했다. 모든 촬영에 함께 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혼자 하는 작업이 아니라 식구들 모두에게 인정받는 분위기인 것은 분명했다. 분교를 다니는 동안, 도시 학교에서만 사는 아이들이 안쓰러웠던 강재훈은 아들을 교환학생으로 시골에 보내기도 했다.

본 적 없는 이의 무덤 앞에서 눈물 흘리는 '어른 남자', 강재훈

그렇게 몇 년 동안 고생해서 찍은 사진을 모아 이번에 전시회를 열었다. 얼마나 기다렸던 전시회였는지. 소식을 듣자마자 전시회장으로 달려갔는데, 너무 서둘렀던지 다음 날부터 개장이라는 이야기만 듣고 헛걸음을 했다. 그러고는 일 때문에 정신없이 지내다가 결국 마지막 날에야 '갤러리 온'에서 그이의 사진을 만났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사람이 담겨 있는,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애정이 담뿍 실려 있는, 그리움이 묻어나는 사진들이었다.

사진을 보는 시선이야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전시회에 내걸린 사진 가운데 나를 가장 많이 웃게 한 것이 바로 이 사진(강재훈 사진집 <산골 분교 운동회> 53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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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재훈

녀석의 긴장한 얼굴을 보노라니 덩달아 나도 이어달리기 선수로 운동자에 서 있는 것처럼 마음이 콩닥콩닥 뛰었다. 2001년 강원도 인제 방동분교에서 찍은 이 사진 속의 꼬맹이는 지금쯤 중학생이거나 고등학생이 되어 있을 게다.

이어달리기 출발선에서 이런 비장한 모습이었다는 걸 이 녀석은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신발도 벗어 던지고, 양말바람으로 총성이 울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이런 순간을. 돌아보면 달리기 출발선에 서 있는 일은 이 아이처럼 한없이 긴장되는 일이었다. 행여나 출발 신호를 놓칠까, 행여나 손에 들고 있는 바통을 놓칠까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었으니까 말이다.

같은 학교에서 찍은 또다른 사진(강재훈 사진집 <산골 분교 운동회> 73쪽)은 2003년 운동회 풍경인데, 역시 아이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웃음이 난다. 엄마 몸빼바지를 얻어 입고 머리에 공을 이고 달리는 이런 모습은 도시 학교에서는 절대 만나 볼 수 없다. 반환점을 도는 동안 몸의 균형이 깨져서 공이 떨어질까 걱정하는 녀석의 표정이 아주 압권이다. 역시 신발을 벗어던지고 달리는 저 진지한 모습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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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재훈

커다란 가마솥을 내걸고 운동회에 온 마을 사람들의 모습도 정겹고, 아이들보다 더 열심히 뛰는 어른들의 모습도 참 좋다. 전시장에 다 걸지 못했던 사진은 사진집에 모아 담았다. 아무래도 인쇄라는 것이 사진가가 직접 현상한 것보다 품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라서, 전시회에 가지 못하고 사진집으로만 강재훈의 사진을 만났더라면 참으로 아쉬울 뻔했다.

아,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강재훈의 사진이 하나 더 있다. 한겨레신문사에 오기 전, 잡지사에 있는 동안 사람들을 인터뷰할 때 찍은 사진 가운데 백기완 선생님의 얼굴을 찍은 것이 있다. 사진이 너무 좋아서 스캔을 받아 놓았는데, 백기완 선생을 곁에서 본 사람들이 이 사진을 보고 그런다. "백 선생한테 저런 표정이 있었어? 놀라운데?" 투사로 평생을 살아 온 이의 내면에 고여 있는 맑은 그리움을 끌어낼 줄 아는 사진가 강재훈. 배우고 싶고, 닮고 싶지만 그 시선을 아무나 가질 수 있다면 부러울 일도 없는 거겠지.

오랜만에 멋진 사진전에서 감동 먹고 와서는 주절주절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생각보다 길어져 버렸지만, 그래도 강재훈이라는 사람의 매력은 십분의 일도 담지 못했다. 앞으로도 그이가 찍을 분교 사진들을, 사람들의 선한 눈빛을 고대할 뿐….

덧붙이는 글 | *강재훈의 산골 분교 운동회 사진전은 지난 6월 1일부터 6월 27일까지 갤러리 온에서 열렸습니다. 가 보지 못하신 분들은 사진집 <산골 분교 운동회>로 강재훈이 사랑한 풍경들을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강재훈의 산골 분교 운동회 사진전은 지난 6월 1일부터 6월 27일까지 갤러리 온에서 열렸습니다. 가 보지 못하신 분들은 사진집 <산골 분교 운동회>로 강재훈이 사랑한 풍경들을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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