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지난 10월 17일 도쿄에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있다. 고이즈미는 "군국주의를 찬미한다"는 주변국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2차대전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신사를 방문했다. 이번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지난 2001년 4월 총리가 된 이후 5번째다.REUTERS/연합뉴스
오는 9월 퇴임 예정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총리가 28일(현지시간)부터 미국을 공식방문 한다. 고이즈미 총리는 지금까지 미국을 방문했던 어떤 정상보다도 극진한 대접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29일 조지 W 부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후 백악관 공식만찬에 참석하며, 다음날에는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포스 원'을 타고 부시 대통령과 함께 테네시주 멤피스로 이동, 엘비스 프레슬리 박물관을 둘러본 뒤 현지에서 다시 만찬모임을 가질 예정이다.
지난 4월 워싱턴을 공식방문 했던 후진타오 중국 주석이 한차례 '오찬' 대접에 그쳤던 것과 비교하면 미국의 '의도성'마저 느껴지는 환대이다. 더구나 타국 정상을 '에어포스 원'에 태우는 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로, 두 정상간 친밀함을 극적으로 과시하기 위한 '기획'으로 풀이된다. 고이즈미 총리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열렬한 팬이라고 말해왔다.
임기를 불과 3개월 남겨놓은 국가 정상이 미국을 공식방문 하는 것이 그리 흔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런 환대를 받는다는 것은 더더욱 그렇다. 이번 경우는 고이즈미 총리와 미국측의 이해관계가 정확히 맞아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이즈미 총리로서는 임기 중 외교분야의 '유일한' 치적인 대미관계를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미국으로서도 '전후 가장 양호한 미-일 관계'를 구축했다는 고이즈미 총리의 5년간 노고를 치하할 필요가 있다. 또 고이즈미 총리가 물러나더라도 다음 정권에 대한 영향력 크게 남을 것이라는 현실적 계산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의제에 오른 양자간 현안이 없다는 점도 고이즈미 시대의 미-일 밀월관계를 상징하고 있다. 주일미군 재편문제는 이미 합의가 이뤄져 일본 내 인준절차를 밟는 중이고, 유일한 경제현안이었던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 문제도 지난 21일 양국정부가 수입재개에 합의, 정상회담 전에 해결된 상태이다.
야스쿠니신사 참배 거듭 정당화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가 이렇게 대미관계의 공고함을 과시하면 할수록 한편으로 더욱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한국, 중국과의 '꽉 막힌' 관계이다. 물론 그 원인은 총리 자신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고집에 있다. 이번 방문길에도 이 문제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는 미국에 들어가기 전 캐나다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참배는 개인의 자유"라며 "아시아 외교는 야스쿠니만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일본언론들이 전했다. 그는 또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면 정상회담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옳은가. 중국의 주장에 따르라고 하는 것이 옳은가"라며 정상회담을 거절하고 있는 한국과 중국 정부를 거듭 비판했다.
최근 들어 이와 관련된 고이즈미 총리의 발언은 과격함을 더해왔다.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대해 한번도 비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미국정부는 내 참배의 진의를 이해하고 있다."(1월 24일 중의원 답변)
"한 가지 문제가 있다고 해서 정상회담을 거부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외국의 정상들과 얘기해 보면 '고이즈미가 옳다. 한국과 중국은 이상하다'고 말한다. 한국과 중국은 왜 정상회담을 하지 않겠다고 이상한 소리를 했을까 하고 후회하는 날이 올 것이다."(4월 25일 취임 5주년 기자회견)
그의 발언에서는 미국의 지지가 자신에게 있다는 강한 자신감과 함께, 한국과 중국의 반발은 안중에도 없다는 오만이 동시에 읽혀진다. 한마디로 '미국과만 잘 지내면 된다'는 신념이 깊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한 방향으로만 표류해온 일본외교
고이즈미 총리의 외교노선이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집권 초기 그는 아시아 외교에도 상당한 정성과 노력을 기울였다. 취임 직후 한국과 중국을 방문했을 때는 서대문독립공원과 중국의 항일운동유적지인 루거우차오를 일부러 찾아가 과거사에 대한 진지한 자세를 보여줬다. 2002년 9월 이뤄진 전격적인 북한방문은 미국에게도 알리지 않고 진행시킨 '독자외교'의 성과로, 동북아 정세를 능동적으로 풀어내려는 일본외교의 창조성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대북관계가 납치문제를 둘러싼 일본 내 여론 악화와 미국의 북핵위기 공개로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가운데, 2003년 5월 부시 대통령과 크로퍼드 목장 회동을 거치면서 외교노선은 급속히 경도되어 갔다. 매년 야스쿠니신사 참배가 반복될 때마다 한·중과의 관계는 냉각돼 갔고, 반면 미국에는 철저히 추종하는 노선을 취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앞장서 지지하고, 마침내 평화헌법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자위대의 이라크 파병을 관철시켰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은 강고한 미일관계를 토대로 동아시아에서 능동적인 외교를 전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역시 야스쿠니 때문에..."
2002년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을 막후에서 연출해냈던 다나카 히토시 당시 외무성 아주국장은 최근 마이니치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현 일본외교의 방향을 이렇게 개탄했다.
초기의 전략과 창조성을 잃어버린 고이즈미 외교. 화려하게 준비된 이번 방미 무대는 역설적으로 그것을 확인하는 장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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