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이 너울대는 세상

[창이 있는 풍경 25] 파주 출판단지 2

등록 2006.07.04 14:21수정 2006.07.04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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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사 사옥. 한 평면에 모나지 않게 다양성이 혼재하는 건물이다.
서광사 사옥. 한 평면에 모나지 않게 다양성이 혼재하는 건물이다.박태신
철학책을 전문으로 내는 서광사 건물에 닿습니다. 다른 데서는 보기 힘든 특이한 점들이 이 건물에 있습니다. 창이 되기도 테라스가 되기도 난간이 되기도 전면 또는 쪽창이 되기도 빈 공간이 되기도 하는, 들어가고 나옴의 형식 없이 이 모든 것이 되는 기이한 벽면입니다.

2층과 4층의 왼쪽 난간은 마치 여객선 선실 통로의 난간 같습니다. 반대로 각 층의 오른쪽 비워 있는 공간에는 그런 난간이 없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각 층의 유리창 형식도 동일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시선을 차단할 필요가 있는 1층은 불투명하게 처리했습니다. 3층의 창은 여닫이창이 중앙에만 있게 했습니다. 복도 창은 3층과 나머지 층의 창 폭을 다르게 했습니다. 마치 직사각형의 집합체를 보는 것 같습니다. 평면 벽 속에 다양성이 녹아 있는 건물입니다.

푸른숲 사옥. 저기 살짝 창이 열린 부분은 바로 자작나무 껍질의 벗겨진 부분이다!
푸른숲 사옥. 저기 살짝 창이 열린 부분은 바로 자작나무 껍질의 벗겨진 부분이다!박태신

이름에 걸맞게 작은 동산으로 둘러싸인 푸른숲 출판사입니다. 건물도 키 큰 나무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는 모양 같다고나 할까요. 1층은 뿌리와 그 윗부분이 되고, 2층과 3층은 줄기, 4층과 천장 부분은 가지와 나뭇잎 같습니다.

어느 건물인가 앞에 자작나무가 심어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얀 종잇장 같은 껍질이 벗겨지는 나무 말입니다. 문득 책을 만드는 출판사와 연관 깊은 나무를 고르라면 자작나무가 적당하겠다 싶은 생각이 듭니다. 푸른숲 사옥의 하얀 벽면도 그 나무를 연상시킵니다.

내부 공사 중이던 어느 건물. 여기 벽면에도 무수한 직사각형들이 모여 있다.
내부 공사 중이던 어느 건물. 여기 벽면에도 무수한 직사각형들이 모여 있다.박태신

세계사 건물에 닿습니다. 1층은 휴게실 겸 자사의 책과 역사를 전시해 놓은 안내 공간으로 되어 있습니다. 창 안으로 육필 원고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가만가만 보니 박경리님, 조정래님, 기형도님 등의 원고들입니다. 눈에 익은 최명희님의 사진도 있습니다. 작가마다 문학 세계가 다르듯 필체나 쓰는 방식도 다양합니다. 타자기로 친 원고도 보이는데 한자를 써야 할 부분은 칸을 비워두었다가 나중에 직접 기입한 흔적이 보입니다.

작가들의 육필원고와 타자 원고. 작가들은 쌓여가는 원고지들을 보며 먹지 않아도 배불렀을 것이다.
작가들의 육필원고와 타자 원고. 작가들은 쌓여가는 원고지들을 보며 먹지 않아도 배불렀을 것이다.박태신

예전에 저도 400자 원고지에다 글을 써보았습니다. 그 느낌을 뭐라고 할까 내 글을 촉각으로 느끼면서 쓴다고나 할까요. 내 글을 읽다 수정할 부분이 있으면 빨간펜으로 직접 수정을 합니다. 한 줄 끝부분에 띄어쓰기 표시가 필요한 부분은 그 표시를 하기도 합니다.


보통 연습장에 초고를 쓰고 나중에 원고지에 옮깁니다. 초고는 다듬어지지 않은 느낌들의 뭉치들이고 그걸 씨줄 날줄 정돈해 놓는 일이 원고지 쓰기가 됩니다. 연습장은 저 같은 경우 줄이 쳐지지 않은 누런 갱지를 선호했습니다. 글씨체는 보통 30도 정도 기울기 마련인데 그렇게 칸과 줄의 방해(?)를 받지 않고 마음껏 써내려갔습니다. 필기 속도보다 빠른 생각을 잡으려면 이런 방식이 저에겐 좋았습니다.

갱지나 백지는 컴퓨터 화면의 빈 공간과도 비슷합니다. 컴퓨터가 좋은 점은 제 나름대로 자판을 마구 쳐도 글씨가 정돈되어 자리자리 놓인다는 것입니다. 문단별로 옮기기도 쉽습니다. 그래서 워드 앞에서 생각을 따라잡느라 땀을 흘리기를 즐깁니다. 아쉬운 것은 제 손으로 수정한 흔적을 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빨간 펜으로 정성껏 수정한 원고는 저자와 편집자 또는 '초교의 나'와 '재교의 나'가 만나고 있다는 흔적입니다.


출판사 다닐 때 200자 원고지에 펜으로 쓴 역자 원고를 많이 보았더랬습니다. 빨간 펜으로 교정을 보고서 조판집에 넘기곤 했습니다. 지금도 원고지에 글을 쓰는 작가가 있을까요. 모르긴 해도 그런 작가의 원고를 맡게 되는 편집자는, 점점 보기 힘들어질 육필 원고를 접한다는 점에서 선택받은 이일 것입니다. 원고와, 워드 정리해서 처음 나온 초교를 대조하는 지난한 작업을 견딜 수 있다면요.

사진을 찍고 있는데 관리 아저씨인 듯한 분이 오셔서 1층 휴게실로 안내해 주십니다. 덕분에 문학의 세계 정확히는 작가들의 세계를 좀 더 살펴봅니다. 아! 세계사에서 펴내는 잡지 중에 '작가 세계'가 있지요. 그 책들도 한 자리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중 제가 좋아하는 작가를 특집으로 다룬 책을 잠시 봅니다.

세계사 휴게실. 카페처럼 열람실처럼 꾸몄다. 멀리 김동리 님의 사진이 보인다.
세계사 휴게실. 카페처럼 열람실처럼 꾸몄다. 멀리 김동리 님의 사진이 보인다.박태신

‘세계사 시인선’도 봅니다. 잡지나 시집은 이렇게 호별로 하나씩 모을 수 있다는 매력이 있습니다. 한 권 한 권 만들어지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어느 사인엔가, 나무의 나이테처럼 한 켜 한 켜 두툼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계사 시인선'은 100호를 기준으로 해서 표지 형식이 달라져 있습니다. 형식은 달라졌어도 크기는 달라지지 않은 것이 다행입니다. 크기가 달라지면 모아 놓아도 밉상이기 마련입니다. 직접 겪은 경험입니다.

출판도시 문화재단 건물의 계단길. 이 계단길을 따라 1층에서 옥상까지 올라갈 수 있다. 오로지 옥상만 갈 수 있는 계단!
출판도시 문화재단 건물의 계단길. 이 계단길을 따라 1층에서 옥상까지 올라갈 수 있다. 오로지 옥상만 갈 수 있는 계단!박태신

‘출판도시 문화재단'이라는 건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건물이 특이합니다. 입구에서 옥상까지 완만한 계단길(100미터는 될까 싶은)로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벽면은 노출 콘크리트이고 바닥도 일부러 마감 작업을 생략한 듯 거친 톤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치 책을 차곡차곡 포개 계단 모양으로 만들었다고나 할까요. 계단의 천장도 이 계단의 모양새와 비슷한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출판과 관계된 곳이라 이런 모양의 착상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곳 출판 단지에서 일부 출판사 건물만 보고 갑니다. 기회가 되면 나중에 다른 다양한 출판사 건물들도 보고 싶습니다.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많은 책들이 우리들 마음을 풍성하게 해주었으면 합니다. 그런 자부심으로 많은 편집자들이 땀을 흘리고 있겠지요.

이 셔틀 버스를 타는 사람들이 신나게 일을 했으면 한다. 긴긴 출퇴근 시간의 피로가 상쇄되게.
이 셔틀 버스를 타는 사람들이 신나게 일을 했으면 한다. 긴긴 출퇴근 시간의 피로가 상쇄되게.박태신

덧붙이는 글 | 2회 걸쳐 파주 출판단지 이야기를 싣습니다. 이번은 두 번째 기사입니다.

덧붙이는 글 2회 걸쳐 파주 출판단지 이야기를 싣습니다. 이번은 두 번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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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번역가이자, 산문 쓰기를 즐기는 자칭 낭만주의자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여행, 책 소개, 전시 평 등의 글을 썼습니다. 『보따니스트』 등 다섯 권의 번역서가 있고, 다음 ‘브런치’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https://brunch.co.kr/@brunocloud). 번역은 지금 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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