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8년 북한이 소형 인공위성인 광명성1호(대포동1호)를 발사하면서 한반도 정세는 가파르게 악화되었다. 하지만 DJ 정부는 특유의 외교력으로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켰다. 사진은 98년 당시 북한이 쏘아올린 광명성1호.통일부 홈페이지
1998년 하반기, "북한이 금창리 지하시설에서 비밀리에 핵개발을 하고 있다"는 <뉴욕타임스>의 보도와 2주 후 북한의 소형 인공위성인 광명성1호(대포동1호) 발사로 한반도 정세는 가파르게 악화되었다.
미국 안에서는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일각에서는 북폭론까지 거론됐다. 공화당 주도의 의회로부터 강한 공격에 직면한 클린턴행정부는 1기 때 국방장관을 지낸 윌리엄 페리를 대북정책조정관으로 임명해, 대북정책을 재검토하고 새로운 정책을 입안토록 했다.
당시 미국 안의 강경론에 밀린 클린턴 행정부는 강경 기조의 대북정책을 채택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 김대중 정부가 미국을 설득하고 나섰다. 김대중 전 대통령(DJ)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면서도, 이들 문제를 대북 경제제재 해제 및 북미관계 정상화와 연계시켜 해결하는 '일괄타결안'을 제시했다.
또한 북한의 광명성1호 발사에 신중한 태도를 보이면서, 북미 미사일회담과 금창리 핵의혹 시설 해소를 위한 북미접촉을 중재하기도 했다. 아울러 닻을 올리기 직전에 터진 금창리와 미사일 문제에도 불구하고 금강산관광 사업과 대북 인도적 지원도 예정대로 추진해 나갔다.
이와 같은 DJ의 뚝심과 철학은 클린턴 행정부를 움직이는데 성공해, 대북포용과 일괄타결을 골자로 한 '페리 보고서'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킨 'DJ외교'가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흔들리는, 그러나 흔들리지 말아야 할 대북 포용정책
미국의 집권세력을 비롯해 여러 가지 차이점이 있지만, 1998~1999년 사례는 오늘날과 흡사한 측면이 있다. 북핵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사일 문제까지 불거졌고, 이에 따라 미국과 일본은 미사일방어체제(MD) 구축 등 군사적 준비 태세를 강화한 것도 닮은꼴이다. 미국 내 대북정책에 대한 논란이 거세지고, 남한의 대북 포용정책이 중대한 도전에 직면한 것 역시 흡사한 모습이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보다 후퇴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큰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정부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도발'로 규정하는 한편, 북한에게 실질적인 부담을 안길 수 있는 조치를 취하겠다며 쌀과 비료의 지원을 유보키로 했다. 또한 북한에 경공업 원자재 유상제공 등 정부차원의 남북경협도 속도조절에 들어갈 조짐을 보이고 있다.
여러 차례에 걸친 남한의 설득과 경고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미사일 발사를 강행한 것은 분명 유감스럽고도 당혹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를 강경기조의 대북정책으로 선회하는 근거로 삼는다면, 이는 자충수가 될 수밖에 없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이유로 쌀과 비료 등 인도적 지원마저 중단한다면,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사업 등 경제협력사업을 지속할 수 있는 명분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다. 국내의 보수파와 미일 양국의 강경파들은 남북경협을 통해 북한에 들어가는 현금이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 개발과 김정일체제 유지비용으로 사용된다며, 경협 축소 내지 중단을 요구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도적 지원의 지속은 남북경협까지 부정적 영향을 차단하는 '방파제'라고 할 수 있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대북 지원축소 등 대북 강경기조의 정책이 과연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는 유용한 정책수단이냐는 것이다. 보수언론과 정치인들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대북 포용정책의 총체적 실패로 규정하고 있지만, 이는 결코 정확한 진단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98년부터 본격화된 DJ의 대북포용정책은 금창리와 미사일 위기를 해소하는데 크게 기여하면서,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병행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부시행정부의 '악의 축' 발언 및 선제공격 채택으로 한반도에 위기가 조성됐던 2002년 봄, DJ정부는 임동원 특사를 평양에 파견해 남북관계를 한단계 발전시키기로 합의함으로써 제2의 6·15시대를 열기도 했다.
2005년 상반기 부시 행정부가 북한을 '폭정의 전초기지'로 규정하고 '폭정의 종식'을 2기 행정부의 대외정책 기조로 내세우자, 북한이 핵보유 선언으로 맞대응하면서 조성됐던 위기상황도 남북대화의 복원 및 정동영 특사의 김정일 위원장 면담을 계기로 수습됐다. 대북 포용정책은 이처럼 때로는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키는데, 때로는 위기가 고조되는 것을 제어하는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오히려 북한의 미사일 발사는 대북 포용정책이 아니라 미국의 대북 강경책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현명한 처사가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근본적인 원인 제공자는 부시 행정부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대북 강경책으로 인해 초래된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를 대북 강경책으로 풀어보겠다는 것은 기름으로 불을 꺼보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대북 포용정책의 대전제는 제재와 압박이 아니라 대화와 협상을 기초로 상호위협 감소 및 경제협력 강화를 통해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는데 있다. 그런데 정부가 미국 주도의 대북제제와 압박노선에 동참한다면, 이는 지난 8년간 어렵게 쌓아온 대북 포용정책의 기반을 허무는 결과를 낳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북 포용정책의 실패를 자인하는 꼴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