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또 한 분의 어머니, '장모님'

장모님, 나의 장모님! 건강하고 행복하게 오래사세요

등록 2006.07.12 21:41수정 2006.07.13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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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천변 둑길에 핀 들꽃들을 사진기에 담다가 저도 모르게 셔터를 눌렀던 모양입니다. 오랜만에 뵙는 장모님의 건강하신 뒷모습에 코끝이 찡해져서는.

천변 둑길에 핀 들꽃들을 사진기에 담다가 저도 모르게 셔터를 눌렀던 모양입니다. 오랜만에 뵙는 장모님의 건강하신 뒷모습에 코끝이 찡해져서는. ⓒ 안준철

전주에 사시는 장모님께서 순천을 다녀가신 것은 보름 전쯤의 일입니다. 오늘 문득 장모님 생각을 하게 된 것은 한 장의 사진 때문이었습니다. 사진 속의 두 모녀는 어딘가를 향하여 열심히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주변 풍경을 보아하니 평소 저와 아내가 자주 걷곤 했던 천변 둑길입니다. 그날 장모님은 75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보무도 당당하게 그 길을 따라 역까지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무더운 여름날에 십리가 족히 되는 먼길을 말입니다.


장모님은 한때 거동이 불편하신 적이 있습니다. 어지럼증 때문에 바깥출입은커녕 화장실에 가시는 것조차 힘들어하셨는데 진찰 결과 평형감각을 관장하는 달팽이관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큰 병이 아니어서 안심은 되었지만 노령 탓인지 생각보다 치료기간이 사뭇 길어지면서 건강미 넘치시던 장모님의 얼굴이 몰라볼 정도로 수척해지셨습니다. 거기에 운동부족으로 관절까지 약해지셨는지 어지럼증이 가신 뒤에도 한 동안 마당에 나가시는 것조차 수월치가 않으셨던 모양입니다.

예전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운동을 열심히 해야 하는데 그동안의 운동부족으로 관절이 약해져 운동을 용이하게 할 수 없고, 그로 인해 몸이 점점 더 쇠약해질 수밖에 없는 그런 악순환이 반복되다 보면 종국에는 장모님의 건강이 회복불능의 상태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자 제 마음은 한없이 우울하기만 했습니다.

사위가 장모님의 병세를 염려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저와 장모님 사이에는 그런 보통의 정리를 넘어서는 남다른 사연이랄까, 그럴만한 연유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제가 장모님을 처음 뵌 것은 제 나이 스물 두 살 무렵입니다. 물론 장모님을 뵙기 전에 아내를 먼저 만났지요. 70년대 중반인 당시에는 휴대폰은커녕 집 전화도 대중화되지 않았던 때라 아내를 만나기 위해서는 어디서 만나기로 미리 약속을 하든지, 아니면 직접 집으로 찾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리고는 대문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 후미진 곳에서 노래를 불러 아내에게 나오라는 신호를 보내곤 했지요.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도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아아….’


아내를 처음 만난 계절이 가을이어서 그랬는지 저는 골목 가로등이나 담벼락에 기대어 이 노래를 즐겨 부르곤 했는데 하루는 한참 노래가 절정으로 치달을 즈음 뭔가 이상한 예감에 감았던 눈을 떠보니(저는 노래를 부를 때 눈을 감는 버릇이 있습니다) 아내가 아닌 장모님이 제 앞에 서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내가 집에 없어서 장모님이 대신 나오신 것 같긴 한데, 그때 장모님이 어떤 표정을 짓고 계셨는지, 그리고 저는 또한 어떤 궁색한 말로 그 어색한 첫 대면의 순간을 넘겼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a 장모님과 함께 걸었던 이 길을 다시 걸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장모님과 함께 걸었던 이 길을 다시 걸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 안준철

아무튼 그로부터 8년의 세월이 흐른 뒤 아내의 어머니는 정식으로 저의 장모님이 되셨고, 저 또한 장모님의 공식적인 사위가 되었지만 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당신을 장모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러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요즘 젊은 사위들이 아내의 어머니를 장모님이라 부르지 않고 친근감이 들도록 어머니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저의 경우는 그 감정의 속살이 조금은 달랐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제가 스물 두 살에 장모님을 처음 뵙고, 그 이듬해에 저를 낳아주신 어머니를 하늘로 보내드린 것과 연관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저는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잔심부름을 잘해드리는 착한 아들이었습니다. 거의 매일 새벽 같이 일어나 집과 꽤 떨어진 마을 가게에서 콩나물이나 두부를 사다드리곤 했습니다. 가게 아주머니들은 첫 마수를 총각이 해주었다고 즐거워하며 콩나물을 한 웅큼 더 얹혀 주시기도 했었지요.

그걸 소쿠리나 냄비에 받아 가지고 쏜살 같이 달려와서는 가쁜 숨을 내쉬며 어머니에게 내밀곤 했으니, 그땐 몰랐지만 제가 자식을 키우는 부모가 되어 보니 그때 어머니의 심정이 어땠을까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어머니와의 추억은 그런 자잘한 생활 속에서 만들어진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뒤 해를 거듭할수록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샘솟았던 것도 바로 그런 하잘것없는 추억 때문이었지요.

어머니에 대한 그리운 추억의 공간을 채워주신 분이 바로 장모님이셨습니다. 만약 제가 아내를 스물 두 살에 만나지 않고 서른 안팎에 만나 결혼을 했다면 사정이 달라졌겠지요. 아내가 오십 줄을 넘어섰어도 여전히 제 뇌리 속에는 꽃다운 스무 살 시절의 처녀로 각인 되어 있듯이 장모님 또한 저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고 계실지도 모를 일입니다. 골목 후미진 곳에서 노래를 부르다 들킨 철없고 얼빠진 청년으로 말입니다.

지금 제가 이렇게 젊은데 어머니는 저보다도 더 젊으신 나이로 세상을 떠나신 것이 아픔으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핑 돌았던 눈물을 몰래 훔칠 때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이미 장모님에 대한 애틋한 마음으로 뒤바뀌고 난 뒤입니다. 저에게는 또 한 분의 어머니이신 장모님이 어머니의 몫까지 오래 오래 살아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할 뿐이지요.

그날 아내와 함께 장모님을 역까지 배웅해드리고 다시 그 길을 따라 집으로 걸어오면서 우리 내외는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십리 길을 걸어오시고도 피곤한 기색은커녕 내친 김에 전주까지 걸어가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을 만큼 예전의 건강을 회복하신 모습을 확인한 뒤였기 때문이지요.

아마 장모님께서도 당신의 강건하신 모습을 딸과 사위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아내와 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사코 역까지 걸어가시겠다고 우기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장모님, 사랑하는 나의 장모님께서 정말 이대로 오랫동안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a 돌아오는 길에 노을도 붉게 물들어 참 아름다웠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노을도 붉게 물들어 참 아름다웠습니다. ⓒ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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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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