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 정글짐 교육정책은 가라

교육 관료들의 성과 내기 경쟁이 교육을 망치고 있다

등록 2006.07.13 09:25수정 2006.07.13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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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많이 내렸다. 산, 들, 바다, 아파트 가릴 것 없이 흠뻑 젖었다. 자연은 그렇게 차별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사회만 유독 사람 키의 크고 작음과 가방끈이 길고 짧음, 그리고 돈의 많고 적음을 두고 이리저리 줄을 세운다.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도 별로 없어 보인다. 다만, 줄을 서는 편이 그렇지 않은 편보다 이익이라는 모종의 사회적 합의가 존재하는 듯하다.

줄 세우기는 기득권 세력의 폭력

나는 줄서기를 싫어한다. 그렇다고 모든 줄서기를 거부하고 새치기를 즐긴다는 뜻은 아니다. 모두가 똑같은 혜택을 누리기 위해 자발적으로 줄을 선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 내가 싫어하는 건 무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선의의 줄서기'가 아닌, 경쟁과 감시, 통제를 위한 '강요된 줄서기'다. 줄 세우기는 서열과 등급을 매겨야만 이득을 보는 집단이 다수의 민중에게 가하는 보이지 않는 폭력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반 미국의 어느 병원에서 어린이들의 재활 프로그램으로 고안했다는 정글짐(Jungle Gym). 얼기설기 얽혀 있고 중간에 사이사이로 빠져나갈 수도 있지만, 결국 다른 사람보다 먼저 높은 곳에 올라가야 이기는 정글짐 놀이에 지금 우리 사회가 푹 빠져 있다. 어릴 때 놀이터에서 해가 저물도록 정글짐에 붙어 놀았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약육강식과 줄 서기를 내면화시키는 참 나쁜 놀이시설이었다.

참여정부는 '제초제 정책'을 펴고 있다

6월 말 대전기독교연합봉사회관에서 대전교육연구소가 발족됐는데, 이사로 참여하신 고려대 강수돌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나라 교육정책은 선택받은 소수를 키우기 위해 대다수 이름 모를 풀들을 죽이는 제초제 정책이다" 그렇다. 지금 자칭 참여정부라고 우기는 노무현 정부가 '정글짐 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해 터를 다지고 있고,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제초제를 마구 뿌려대고 있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해서 밤새 죽지 않을 만큼 적당히 뿌려놓고 날이 밝으면 언제 그랬냐는 식이다. 풀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능력이 부족해서 남들보다 더 잘 자라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교육부가 요즘 미친 듯이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 아니, 일을 열심히 저지르고 있다. 교원평가 연착륙을 위한 성과급 차등지급률 확대, 대한민국을 입시공화국으로 만들 방과후 학교 전면화, 제 밥그릇 지키기를 위한 교장초빙공모제 시범실시, 수월성 제고를 명분으로 한 국제학교·공영형 혁신학교 등 평준화 해체 시도, 사교육의 주범인 1·2학년 영어조기교육 시범 실시, 아이들 줄 세우기의 완결판이 될 학업성취도평가 전면 확대를 위한 초·중등교육법 개정안 입법예고 등등 끝이 없다. 교육부가 새로운 정책만 만들어 내지 않아도 우리 교육은 나아질 것이라는 볼멘소리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올 만하다.


정책 생산할수록 공교육 황폐화되고 있다

21세기 우리 아이들은 정말이지 죽을 맛이다. 조령모개로 뒤바뀌는 입시정책은 말할 것도 없고, 사교육비를 경감한답시고 내놓는 정부의 정책들이 죄다 과중한 학습노동과 고통만 가중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방과후 학교' 정책이 대표적인 예다. 청와대가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라고 일컬어지는 방과후 학교는 사교육비 경감 및 교육 양극화 해소를 명분으로 추진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사교육비가 경감되기는커녕, 방과 후에 사교육에만 시달리던 아이들이 이제는 학교과외까지 받아야 하는 형편이 된 것이다. 중학교에서는 문제풀이 보충수업이 부활되고 있고, 일부 성적우수자만을 대상으로 한 특별반을 만들어 교육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있다.


교육부는 지금 딜레마에 빠져 있다. 방과후 학교를 본래 취지대로 운영하자니 학생-학부모가 외면하고, 입시교과 위주로 운영해서 참여율을 높이자니 학교를 학원화한다고 비난받고. 그런데도 똥고집을 부리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간단하다.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잘못을 인정하고 가던 길을 되돌아가게 되면, 대통령 및 청와대, 교육부장관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방과후 학교 추진팀은 어떻게 해서든 성과를 만들어 내려고 무리수를 두고 있는 것이다.

길을 잘못 들었으면 되돌아가는 것이 상책

이를 입증할 수 있는 결정적 증거는 없다. 하지만 교육관료들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대전시교육청은 얼마 전 교실수업을 혁신하겠다며 전국 최초로 초등학교에서 '영어로 하는 수학·과학 수업'을 운영하고 있다고 자랑을 했다. 추진 배경을 알아보니 초등교육과 모 장학사가 제주 특별자치도 사례를 성급하게 벤치마킹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막상 초등 영어 몰입교육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제주도에서는, 초등학교 3학년에게 영어로 수학·과학수업을 한다는 것이 무리라는 판단 하에 6학년 아이들에게 3학년 교육과정의 일부를 시험 삼아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대전은 '전국 최초'라는 성과 내기에 급급하여 충분한 검토 없이 졸속으로 교육정책을 밀어붙인 것이다.

요즘 한창 불이 붙은 차등성과급 논란도 본질은 마찬가지다. 교육부 산하 교원평가추진팀은 무슨 일이 있어도 교원 성과상여금의 차등폭을 대폭 늘려야 살아남을 수 있다. 성과급 평정 제도가 침투되지 않은 거의 유일한 영역인 교육 분야를 뚫고 들어가 깃발을 꽂는다면, 그 공과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일단 일을 저질러 놓고 본다. 그러고 나서 상황을 봐 가며 조금씩 후퇴하는 전략은 예나 지금이나 관료들의 못된 고질병이다. 결국 '그들만의 리그'를 위해서 무리한 정책을 쏟아내고 있고, 잘못된 정책으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아이들과 학부모, 교사가 당하고 있는 꼴이다.

성과 내기 경쟁이 우리교육을 망치고 있다

차등성과급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경찰 사회에는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이 있다. 언뜻 생각하면 되도록 집회나 시위가 없어야만 높은 점수를 받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집회나 시위 등이 많을수록-물론 별 탈 없이 마무리돼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다-팀의 성과가 높게 나온단다. 세상에 이런 아이러니가 또 어디 있는가. 이렇듯 팀이건 개인이건 눈에 보이는 성과를 만들어 내야만 높은 점수를 받는 것이 성과연봉제의 맹점이다. 경쟁이 어느 정도 효율을 증대시키고 생산성을 높이는 건 사실이지만, 과도한 경쟁은 오히려 효율을 떨어뜨리고 삶의 질을 파괴시킨다.

이제 정글짐 얘기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당신이 만일 <쥬라기공원> 영화 한 편이 현대자동차 150만대 매출과 맞먹는다느니, 빌 게이츠 한 사람이 수만의 노동자가 일한 성과를 능가한다는 식의 자본가 이데올로기에 찬동한다면, 그대는 분명 어린 시절 정글짐에 너무 오래 매달려 있었거나 아니면 자연과 더불어 호흡한 시간이 부족한 사람일 것이다.

땅심을 기르기 위해 흙을 갈아엎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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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땅에 동일한 농작물을 3년 이상 연작을 하면 땅심이 없어지게 마련이다. 제초제를 뿌리면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삶의 터전인 땅을 망치는 지름길이다. 백년지대계라 부르는 교육은 오죽하겠는가. 정글짐은 좋은 놀이기구가 아니다. 아니, 설사 정글짐을 만들더라도 시소나 그네를 타거나 모래장난에 열중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정글짐에만 매달려 놀아야 한다고 강요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덧붙이는 글 | 신정섭 기자는 전교조 대전지부 정책실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 칼럼은 대전시민과 전문가,지역활동가들간의 의사소통과 시민 공론의 장을 위해 <대전시민아카데미>와 <대전충남오마이뉴스>가 마련한 참여공간입니다. 

*대전시민아카데미(http://www.tjcivilacademy.or) 바로가기

덧붙이는 글 신정섭 기자는 전교조 대전지부 정책실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 칼럼은 대전시민과 전문가,지역활동가들간의 의사소통과 시민 공론의 장을 위해 <대전시민아카데미>와 <대전충남오마이뉴스>가 마련한 참여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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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대전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교사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맘껏 놀고, 즐겁게 공부하며, 대학에 안 가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상식적인 사회를 꿈꾸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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