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두리 모래사막의 주인은 바람이다

미군트럭, 골프장, 펜션은 이 곳의 주인이 아니다

등록 2006.07.18 11:59수정 2006.07.21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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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은주

"끝없이 펼쳐진 모래를 보자 고개를 돌리지 않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똑바로 앞을 향해 걷고 싶은 오랜 갈망이 되살아난다. 내게는 사막에서 길을 잃고 싶은 강렬하면서도 신비로운 갈망이 있는데, 그것은 거의 중독에 가깝다. 포도주도, 여자도, 그리고 그 어떤 생각도 그토록 치명적이면서도 감미롭게 내 마음을 움직인 적은 없었다."

충남 태안군 원북면 신두리 모래밭에 서자 내 머리는 저절로 카잔차키스가 <천상의 두 나라>에 썼던 이 이야기를 떠올리고 있었다. 몇 해 전과 똑같다. 아니, 황폐했던 겨울 풍경을 지나 바람에서조차 초록빛이 느껴지는 풍성한 계절에 다시 왔으므로 같은 곳이지만, 확연히 다른 풍경이다. 하지만 신두리 모래사막에 부는 바람은 여전히 입안을 까끌까끌 불편하게 하는 모래바람 그대로다. 변하는 것들과 변하지 않는 것들 사이에 서 있는 신두리 모래언덕은 크게 상처받았지만 여전히 의연한 얼굴로 사람들을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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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은주


a 겨울 신두리 모래밭에 찍힌 발자국

겨울 신두리 모래밭에 찍힌 발자국 ⓒ 김은주

천연기념물 제431호인 신두리 사구해안은 바람이 만들었다. 바닷가 모래가 육지에 쌓이고 쌓여 모래언덕이 된 것인데 습지까지 끼고 있어 아주 다양한 생태계를 보여 준다. 바다가 보내 준 모래들이 40만 평이 넘는 모래언덕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만 아득해지고 만다.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렸을 것인가. 알갱이 하나하나 바람을 타고 이만큼 언덕으로 옮겨 오는 동안, 그리고 다시 바람을 타고 육지 여기저기로 흩어져 가는 동안 이 모래언덕에 몰아쳤을 시간이 보는 이에게 경탄을 일으킨다.

모래밭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거기 꼬물거리고 살고 있는 녀석들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온다. 바람에 일렁이는 억새들을 지나 모래언덕을 올라가면 나팔꽃을 닮은 앉은뱅이 갯메꽃 군락을 금세 발견하게 된다. 하늘을 향해 나팔을 불고 있는 녀석들의 수줍은 교향악은 실잠자리며 벌을 잔뜩 불러들이고 있다.

지천으로 피어 있는 개망초며 대낮에도 지지 않고 피어 있는 달맞이꽃들도 반갑다. 밤에만 피어 있어야 할 녀석들이지만 비가 내리다 말다 하는 날씨에 헷갈리는 모양이다. 꽃 진자리마다 동그랗고 빨간 열매를 잔뜩 매달고 있는 해당화 푸른 이파리도 정겹다. 무리 지어 있는 해당화를 이렇게 실컷 구경할 수 있는 곳도 덕적도 언저리나 굴업도 정도였지, 내륙에서는 만나기 힘들다.

a 신두리에 피어 있는 갯메꽃

신두리에 피어 있는 갯메꽃 ⓒ 김은주


a 100원짜리 동전만 한 개미귀신 집

100원짜리 동전만 한 개미귀신 집 ⓒ 김은주

허리를 잔뜩 구부리면 개미귀신 집도 보인다. 모래에 깔때기 같은 구멍을 파 놓고 지나가는 곤충들이 구덩이에 빠지면 낼름 잡아다가 즙을 빨아먹는 녀석인데, 구덩이를 구경하는 동안 작은 벌레 두 마리가 빠져서 허우적대는 광경을 확인했다. 하늘에는 잠자리들이 용용 죽겠지 약을 올리면서 가득 날아다닌다. 잠깐이라도 앉아 주기를 기다리면서 쫓아다녔는데 좀처럼 앉지는 않고 커다랗고 둥근 눈으로 나를 어지럽게만 한다.

몇 해 전 처음으로 신두리를 찾았을 때는 시든 갯메꽃과 잔뜩 얼어붙은 해당화 열매, 마른 억새들만 가득한 황폐한 풍경 앞에서 마음까지 서걱대는 것 같았다. 초록이 시들고 모래만 가득한 신두리에 불어오는 바닷바람은 말할 수 없이 맵찼다. 인적 없는 겨울 바닷가 역시 스산하기만 해서 모래언덕에서 내려다보는 겨울 바다는 쓸쓸하고도 처량한 몰골이었다.


겨울 신두리에서는 파도가 일으키는 물결 모양 그대로 바람이 모래땅에 그려 놓은 지도를 만날 수 있었다. 풀들이 생기를 잃은 계절이라 바람결이 한결 더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여름, 초록으로 뒤덮인 신두리는 완전히 새로워 보였다. 이미 만났으나 내가 만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되는 기분이었다.

a 겨울 황량했던 신두리 풍경

겨울 황량했던 신두리 풍경 ⓒ 김은주


a 겨울 신두리에서 말라 버린 통보리사초

겨울 신두리에서 말라 버린 통보리사초 ⓒ 김은주

"지금도 그 때 생각하믄 원체 멋있었어."


지금은 폐간된 잡지 <흙으로빚은이야기>를 보니 신두리에서 나고 자란 할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하고 있었다. 신두리에 살고 있는 사람들 역시 이 모래언덕에 순하게 기대 사는 동안은 이 곳을 아끼고 사랑했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사유재산 침해 방조하는 태안군은 주민의 권익을 보호하라! 문화재 지정 즉시 취소하라!"

모래밭 한켠에 세워 둔 간판은 날선 얼굴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있다. 신두리 땅주인들은 신두리 모래밭 46만 평 가운데 31만 평이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것을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하긴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고는 해도 경제 논리에 밀려 이 고운 모래언덕이 언제 끝장이 날지 알 수 없는 일이기는 하다.

모래밭 안에 차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늙은 할아버지의 굽은 어깨가 아니었다면 나는 또 뾰족한 마음이 되어 주민들을 마구 미워했을지도 모르겠다. 불현듯 사진 찍는 노익상 선생의 말이 떠올랐다.

깊은 산골로 다니다 보면 농약 치는 농부들에게 땅이 다 죽으니 그러지 마시라는 소리가 절대로 안 나온다고, 농약 쳐서 상품가치 높은 농산물이 나올 수만 있다면 그저 열심히 농약 치시라 응원할 수밖에 없다고, 먹고살 길이 그것밖에 없는데 등 두드릴 수밖에 없노라고 하셨지. 조화를 이룬다는 것, 개발이든 보존이든 그 가운데 알맞은 선을 찾는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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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은주


a 신두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통보리사초

신두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통보리사초 ⓒ 김은주

지금 신두리는 새로 생긴 펜션에 머무는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다. 바람소리만, 불어가는 모래바람만, 그 바람에 몸 뒤채는 해당화 이파리만, 어디 있는지 보이지는 않지만 모래언덕 어딘가에 깃들어 산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금개구리만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니던가. 더 이상 신두리는 신두리가 아니었다. 주민과 정부의 싸움 속에서 신두리 모래언덕은 조용히 망가지는 중이었다. 겨우 남아 있는 모래밭도 끝없이 위협 당하고 있었다.

작년 8월에는 미군이 군용 트럭을 끌고 와서 이 곳 모래언덕을 마구 돌아다녔는가 하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골프장을 만든다는 소리도 들린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자연 유산도 미군들 훈련 앞에서는 아무 힘을 못 쓴다는 것도 화가 나고, 안 그래도 차고 넘치는 골프장이 굳이 여기까지 생겨야 하나 싶어 가슴이 답답해진다.

어쨌든 신두리의 미래는 걱정스럽다. 얼마 전 홍상수의 새 영화 <해변의 여인>을 찍은 곳도 여기 신두리 해수욕장이었고, 드라마 <101번째 프로포즈>에서 주인공 박선영의 아버지가 사는 곳 역시 이 곳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림이야 끝내주지만 보는 마음이 영 편하질 않았다. 꽃박람회 이후로 완전히 망가져 버린 꽃지 해수욕장처럼 이 곳도 그렇게 망가질 날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안타깝다.

그저 이 곳을 찾는 이들이 조금만 더 조심스러운 태도이기를 바랄 수밖에. 남의 집을 방문하는 사람이 조심스럽고 공손한 자세를 취하는 것처럼, 신두리 모래밭을 찾는 이들도 다른 생명체들이 먼저 자리 잡고 살고 있는 그 땅을 시끄럽지 않게, 흔적도 남지 않게 조용히 다녀가기를 바랄 수밖에.

신두리에서 이리저리 해찰 하는 동안 물기를 잔뜩 머금고 있던 하늘이 갑자기 비를 쏟아 붓기 시작했다. 어쩐 일인지 따뜻하게 느껴지는 비다, 인디안 섬머처럼. 초원에 내리는 빗줄기는 햇살을 머금고 놓지 않아서 반짝인다. 여우가 시집을 가는 날이라던가, 호랑이가 장가가는 날이라던가, 반짝이며 신두리에 내리는 비가 참 예쁘고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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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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