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도 민중이 있었다

[서평] 이토 나리히코의 <일본은 왜 평화헌법을 폐기하려 하는가>

등록 2006.07.18 18:56수정 2006.07.19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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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잔인함, 뻔뻔함, 교활함, 적반하장 등일 것이다. 대아시아 공영권 구축이라는 명분 아래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무자비하게 인명을 살상한 나라. 인간을 '마루타'라고 명명하며 생체실험을 하는가 하면 '위안부'라는 명목으로 젊은 여인들을 군대의 성노리개로 삼았던 극악무도한 사람들. 그러고도 반성은커녕 오히려 식민지 시절 한국을 개발시켜 주었다고 큰소리치는 적반하장의 나라.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일본은 이런 이미지이다.

<일본은 왜 평화헌법을 폐기하려 하는가>
<일본은 왜 평화헌법을 폐기하려 하는가>행복한책읽기
그러나 물론 일본에도 민중이 있었다. 일본이 난징에서 학살극을 벌일 때 이에 분개해서 들고 일어나고, 한국인의 3·1 운동에 동조해서 민주주의 운동을 함께 일으키고, 일본의 평화헌법 제 9조가 지켜지도록 수차례에 걸쳐서 데모를 벌여온 민중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지금도 없어질 위기에 처해 있는 평화헌법 제 9조를 수호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일본의 전후사는 평화헌법을 수호하려는 평화세력, 즉 민중세력과 다시 재무장하여 국력을 확장시켜나가려는 보수세력 간 주도권 다툼의 역사였다.

…이시바시 단잔의 후임으로 들어선 이가 기시 노부스케였다. 이시바시에서 기시로의 정권교체는 말 그대로 극과 극의 전환이었다. 전후 자민당 수상 중에서 '헌법 9조를 지켜야만 한다'고 주장했던 이는 이시바시뿐이었다. 기시는 그와는 정반대로 개헌론자이며 반공주의자였다. 게다가 기시가 수상이 되기까지 미국 CIA가 막대한 자금을 투입했다는 사실이 최근 공개된 미국 CIA자료에서 밝혀졌다. 미국 정부는 기시를 수상으로 앉혀 놓고는 개헌 및 재군비노선에 막강한 입김을 불어 넣고자 했던 것이다…

2차대전 A급 전범이었던 기시가 수상이 된 이후 일본은 극도의 보수노선을 걷게 되고 지금의 고이즈미에 이르게 된다. 이제 일본이 미국과 연대해서 노골적인 재무장에 들어갔다는 사실은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일본은 이제 평화헌법 제 9조의 형식적 폐기만을 눈앞에 두고 있을 뿐이다.

저자인 이토 나리히코는 일본이 히로시마 원폭이라는 비극에 이르게 된 과정을 '군국주의의 확장'이라는 데 촛점을 맞추어 총체적이고 명료하게 그려내고 있다. 1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적 상황, 맹목적으로 독일을 추종했던 일본의 광기, 불리한 전세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할 수밖에 없었던 정황을 그때그때의 역사적 상황과 함께 일목요연하게 그려내고 있다. 일본의 잘잘못을 칼처럼 지적해가며 진행되는 그의 역사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1,2차 세계대전과 전후 일본의 현대사에 걸쳐서 폭넓고 균형 있는 안목을 갖게 된다.

어떤 전쟁도 합법적일 수 없고 정당할 수 없다는 확고한 입장에 서서 일본의 현대사를 그린 저자의 시선은 한국 민주주의 세력의 시선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한·일 협정에 관한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자.


…1965년 한·일 기본조약이 체결되었으나 이 조약의 어디에도 일본의 식민지 지배 역사도, 일본의 전쟁 책임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아니 단지 언급되어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박정희 장군이 쿠데타로 대통령이 되었을 때, 기시 등 예전에 조선. 만주를 지배했던 인물들은 무척이나 기뻐하였다. 박정희 장군은 전전 및 전쟁 중에 만주 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제국의 신하가 되어 자국 동포들의 항일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기시 등 예전의 식민지 지배자들은 박정희 장군에게 선거 자금을 제공하는 등 그가 정권을 잡도록 도왔다. 그리고는 일본 정부가 식민지 지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아서 1951년 이래 14년간이나 질질 끌어왔던 한·일 조약 교섭마저도 단숨에 해결되고 한·일 기본조약이 체결되었다…



모든 독일 국민들이 나치에 동조했던 것이 아니었듯, 모든 일본인들이 광기어린 군국주의에 동조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대다수의 일본인들이 지도부의 광기어린 군국주의에 휘말려 젊음과 인생 자체를, 그리고 가까운 이들의 목숨을 제물로 바쳤다. 다수의 일본인들도 한국인이나 중국인 못지않은 희생자였던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전쟁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 전쟁을 벌이는 것은 한 국가 전체가 아니라 야심에 가득 찬 몇몇 지도부이다. 이러한 개인의 야욕이 인류의 역사에 피 비린내 나는 전쟁사를 또다시 새겨 넣지 않도록 민중은 연대해야 한다.

물론 한국민중과 일본민중도 마찬가지이다. 전쟁을 일으키는 몇몇의 지도부가 즐겨 이용하는 것이 '애국심'이 아니었던가. 국경을 초월한 민중의 연대로 더 이상의 참상을 막아야 한다. 이것이 평화헌법을 수호해야만 하는 이유이고, 일본의 평화헌법 수호가 아시아 전체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리고 이러한 저자의 목소리에 의해 우리는 전쟁의 비합법성에 대해 깨닫게 됨과 동시에 슬며시 일본 민중과 화해하게 된다. 우리가 살해되고 빼앗기는 동안 역시 살해되고 기만당하고 빼앗겼던 그들. 그들의 삶을 똑같은 인간으로서 새롭게 연민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이 책을 읽으면서 얻게 되는 가장 큰 열매일지도 모른다.

일본은 왜 평화헌법을 폐기하려 하는가 - 평화헌법이야기

이토 나리히코 지음, 강동완 옮김,
행복한책읽기,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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