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 쫓기 위해 읽었던 '동양화 변천사'

더위에 지친 만삭 아내를 위해 남편이 준비한 특별한 피서법

등록 2006.07.19 16:14수정 2006.07.24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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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전 결혼을 하고 신접살림을 차린 곳을 반지하 단칸방이었다. 햇빛은 물론이고, 더운 땀을 식혀주는 바람 한 점 들지 않는 곳에서 여름을 맞이하고 보니 선풍기도 없는 지하방은 고구마를 쟁여놓는 작은 뒤주같았다.


아침부터 푹푹 찌던 방안은 해질 무렵이 되던 찜통이 따로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아무리 더워도 땀이 잘 나지 않는 고약한 체질탓에 금세라도 내 머리에서는 "삐이~"하는 고동소리와 함께 물이 보글보글 끓어 오를 것 같았다.

게다가 뱃속에는 아이까지 있었으니 그 고통과 짜증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한창 잘 먹어야 할 임신기간 중에 식욕을 잃은 건 물론이고, 불면증에 시달리는 밤이 계속되다보니 나는 눈밑의 다크서클이 매력적인(?) 고슴도치가 되어가고 있었다.

남편은 행여라도 고슴도치 가시에 찔릴까봐 감히 옆에 오지도 못했다. 설사 가시에 찔리는 고통을 참으며 다가온다 해도 받아주지를 않았으니 같이 살자고 먼저 옆구리 찌른 사람에 대한 배신감으로 남편 역시 그 밤이 가히 편치만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배신감에 백이십근 살들이 떨려온다 해도 그래도 임신까지 한 마누라를 어찌 등한시할 수가 있겠는가. "이것도 싫어! 저것도 싫어! 이것도 하지마! 저것도 하지마!" 시원한 대답 한 번, 웃음 한 번 흘려주지 않는 마누라의 비위를 맞추느라 목석같은 남편은 저녁마다 온갖 애교를 다 짜내느라 비지땀을 뚝뚝 흘려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반응을 보이기는커녕 되려 화를 내며 가시를 바짝 세우기 일쑤였다. 그러니 남편은 발길질을 해대는 아이의 태동을 느끼고 싶어도 말도 못한 채 나의 발끝만 만지작 거리며 "애기 놀아? 나 배 좀 만져보면 안 되지?"하며 고추 당추보다 더 매운 임신한 마누라 비위 맞추기에 열을 올려야 했다.


더위를 쫓기 위해 남편이 준비한 것은 화투 한통이었다.
더위를 쫓기 위해 남편이 준비한 것은 화투 한통이었다.오마이뉴스 박상규
그런데 어느 날인가 아이의 발길질에 신경질이 더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더위 때문에 까칠해진 엄마 때문에 아이까지 까칠한 고슴도치가 될 것 같아 더럭 겁이 났다. "아가는 나처럼 이렇게 까칠하면 안되는데…" 혼잣말로 중얼거렸는데 남편이 듣고는 뭔가 생각난 듯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화색이 만면한 얼굴로 돌아온 남편의 손에는 작은 선풍기 한 대와 화투 한 통이 들려 있었다.

너무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혔다. 더위 때문에 까칠해지고, 까칠해져서 태교까지 걱정하고 있는 마누라에게 아이스크림 사와서 위로를 해도 먹을까 말까 하는데 화투라니….


하지만 "사온 사람의 성의를 봐서라도 딱 한판만 치자!"는 남편의 성화와 지는 사람이 야식을 사오기로 하자는 사탕발림에 못 이겨 결국 판을 벌이는데 동의를 하고야 말았다. 누구보다 지는 걸 싫어했던 나였다. 뭐든지 다 이해해주는 남편을 만나 그 동안 잊고 있었던 승부욕이 화투판 위에서 되살아나고야 만 것이다. 게다가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했던가?

노름으로 빚 장부만 두어권 남기고 가신 할아버지 덕에 일평생을 남의 눈치를 보느라고 과일 한 조각, 옷 한 벌도 얼른 사입지 못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세상에서 제일 몹쓸 물건이 화투이고, 제일 몹쓸 인간이 화투 치는 인간이고, 이판 저판 다 뒤져봐도 화투판처럼 나쁜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화투라면 치를 떨며 가까이 가지도 않았건만…, 사람일이란 게 알 수가 없는 모양이다.

막상 손에 쥐고 보니 그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이해됨은 물론이고 세상에서 이것만큼 재미나고 사람을 감질나게 만드는 것이 없었다. 게다가 들어오는 돈 몇 푼이 얼마나 오지던지 말이 필요 없었다.

이른 저녁을 먹고 시작한 화투놀이는 새벽 2~3시까지는 기본으로 이어졌다. 물론 남편의 배려와 유전적인 요인으로 대부분의 판은 나의 완승이었다. 남편은 주머니를 탈탈 털어 야식을 사 오면서도 한번도 짜증을 내지 않았다.

그런데 처음에는 한두번 마누라 기분 맞춰주려고 져주던 남편도 주머니가 얇아질수록, 밤이슬을 맞는 횟수가 잦아질수록 '초심'을 잃어버리고는 언제부턴가는 슬쩍슬쩍 보여주던 패도 가슴팍에 싸쥐고는 절대 보여주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맞지도 않는 패를 슬쩍 집어가는 편법마저 사용하는 것이 아닌가.

화투를 쳐봐야 그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다고 했듯이 십원때문에 설날아침 아버지로부터 생솔가지 세례를 받아야 했던 비밀에 붙여둔 나의 과거와 성질이 나올 뻔했다.

"앗싸 내가 똥 먹었다! 자기는 그냥 죽어!"
"내가 쌌다. 자기는 오늘 피박을 면치 못할 걸!"

저녁마다 오고가는 이런 대화 속에 더위는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 덕인지 아이의 발길질도 부드러워졌고, 나 역시 더 이상 까칠해지지 않고 그해 여름을 잘 넘길 수가 있었다. 밤마다 볼이 터져라 먹어댄 야식때문에 불은 30kg의 살들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런데 태교덕일까? 아이는 유난히 승부욕이 강하다. 특히 비와 똥에 예민하니 이를 반가워해야 할까, 아니면 통탄해야 할까? 그 아이가 가끔 내게 물어온다.

"엄마! 내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엄마는 뭐 먹었어요? 무슨 책 읽어주셨어요?"
"응! 엄마는 난을 치고, 비를 보며 시를 읋었고, 두엄을 보며 이 땅의 싱싱함을 배웠지. 그리고 가장 즐겨읽던 책은 바로 '동양화의 변천사'였단다."

엄마의 말을 철썩같이 믿어 의심치 않는 아이는 눈동자를 굴리며 "나도 엄마처럼 꼭 동양화를 배울래요!" 천연덕스럽게 대답을 해온다. 그 아이에게 뭐라 말을 해줘야 할까? 동양화의 진미는 더운 여름 밤이라고? 족발과 겸하면 금상첨화라고? 하여튼 아직도 다 빠지지 않아 출렁이는 뱃살을 보면 어느새 추억이 된 그 여름밤의 화투가 생각이 난다.

덧붙이는 글 | 생활속의 이야기에 실렸습니다.

☞ [기사공모] 2006 이 여름을 시원하게

덧붙이는 글 생활속의 이야기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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