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랜드' 수사, 검찰이 화를 자초했다

[김종배의 뉴스가이드] 수사가 어려운 게 아니라 안된 것

등록 2006.07.21 09:32수정 2006.07.21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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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태학 에버랜드 전 사장.
허태학 에버랜드 전 사장.오마이뉴스 권우성
법원이 대놓고 요구했다.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발행사건 항소심을 맡고 있는 서울고법 형사5부는 검찰에게 혐의를 입증하라고 했다.

허태학·박노빈 삼성에버랜드 전·현 사장이 적절한 가격 산정을 위한 노력이나 정당한 이사회 결의를 거치지 않고, 전환사채를 실제 가치보다 현저히 낮은 7700원에 이재용씨 남매에 넘긴 것만으로도 배임죄가 성립한다는 검찰의 주장에 대해 재판부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결과일 뿐 과정을 밝혀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의 요구사항은 간단하다. 배임죄가 성립하려면 허태학·박노빈씨가 누구와 공모했는지를 입증하라는 것이다.

배임죄로 이들을 처벌하기 위해서는 배임행위의 고의성이 입증돼야 하니까 전환사채가 헐값에 이재용 씨에게 넘어갈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 즉 우선 배정권을 갖고 있던 삼성물산이나 중앙일보 등이 실권을 결정할 때 누구의 지시로, 누구와 공모했는지, 또 허태학·박노빈씨는 이 점을 미리 알고 있었는지를 입증하라는 것이다.

배임행위 증거를 대라면 그래야겠으나...

박노빈 에버랜드 사장.
박노빈 에버랜드 사장.오마이뉴스 권우성
얼핏 봐선 당연한 요구 같다. 사건의 전모를 알아야겠으니 증거를 대라는 요구에 무슨 항변을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검찰은 대놓고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두 가지 점을 들고 있다. 전환사채 헐값발행 행위만으로도 배임죄가 성립한다는 게 하나이고, 공모관계를 밝히는 게 사실상 어렵다는 게 다른 하나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걸까? 언론은 무죄 선고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한국일보>는 "재판부가 무죄 선고의 심증을 갖고 정지작업을 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이런 관측엔 의심이 깔려 있다. 재판부가 정치적 판단 하에 몰아가기를 하고 있다는 의심 말이다. 하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접자. 드러난 부분만 짚자.


논란의 핵심은 배임죄 성립요건이다. 이걸 두고 재판부와 검찰이 이견을 보이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1심 재판부와 항소심 재판부 사이에서도 이견이 나타났다. 공모관계를 입증하지 않았는데도 유죄를 선고한 1심 재판부의 판결에 대해 항소심 재판부는 "논리적 비약이 있었다"고 비판했다.

누구의 법 해석이 타당한지를 살피는 게 논란을 종식시키는 지름길이겠지만 쉽지 않다. 육법전서를 달달 외운 사람들이 이렇게 다른 의견을 피력하는 마당에 일반인이 끼어들 여지가 어디 있겠는가. 대법원의 최종 판단을 기다리는 게 더 타당할지 모른다.

따로 살펴볼 게 있다. 항소심 재판부의 입증 요구가 옳건 그르건 검찰이 화를 자초한 측면이 크다. 이건 얼치기 일반인이 하는 얘기가 아니다. 검찰을 지휘하는 법무장관이 한 말이다.

천정배 "33명 중 2명만 기소, 적절치 못했다"

천정배 법무장관.
천정배 법무장관.오마이뉴스 이종호
천정배 법무장관은 지난 3일, 전환사채 헐값발행사건으로 고발된 사람이 33명이었는데 검찰은 허태학·박노빈씨 두 명만 기소했다는 점을 환기시킨 뒤 "적절치 못했다"고 비판했다.

법학교수 43명이 이건희 삼성 회장 등 33명을 검찰에 고발했는데도 3년 동안 수사를 하지 않고 질질 끌다가 업무상 배임죄의 공소시효가 끝나기 하루 전인 2003년 12월에야 허태학·박노빈씨만 따로 떼어내 기소한 처사를 비판한 것이었다.

천정배 장관의 이 비판을 받아 항소심 재판부의 입증 요구에 대입하면 어떤 말이 나올까? 고발과 동시에 사건 관련자들을 불러 공모관계를 수사했다면 항소심 재판부의 입증요구는 애당초 나올 여지조차 없었을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의 입증 요구에 대해 검찰은 "사실상 수사가 어려운 부분"이라고 볼멘소리를 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수사가 어려운 부분"이 아니라 "수사가 안 된 부분"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누가 지시했는지를 입증하라고 했지만 검찰은 이건희 회장 부자나 이학수 삼성 부회장을 소환조사하지 않았다. 삼성물산이나 중앙일보 등 실권을 선택한 과정을 밝히라고 항소심 재판부가 요구했지만 검찰은 홍석현 당시 중앙일보 사장을 조사하지 않았다.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더 있다. 검찰은 조만간 이들을 소환조사할 방침이라고 했다. 항소심 재판부가 어떤 판결을 내리든 대법원 상고는 필연적이고 그러면 공소시효 정지상태는 유지되니까 나중에 이들을 불러 조사하겠다고 한다.

벼락치기 조사, 할테면 하라지만...

고발 즉시 조사하기는커녕 질질 끌다가 공소시효 정지상태에 기대 벼락치기 조사를 해야 하는 이유는 따로 묻지 말자. 정말 궁금한 건 이들을 불러 조사한다고 뭐가 나오겠느냐는 점이다. 검찰 스스로 "수사가 어려운 부분"이라고 밝혔다면 소환조사는 통과의례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항소심 재판부가 공모관계 입증을 위해 검찰에 부여한 기간은 한 달이다. 다음달 24일 재판이 속개된다.

이때까지 검찰이 입증을 하지 못하면 무죄가 선고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법정 다툼은 전환사채 헐값발행 지시·공모자 전체가 아니라 실행자 허태학·박노빈씨의 유죄 여부로 국한된다. 그 걸로 끝이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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