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자유를 위해 한국을 떠난다

낯선 땅, 당신의 응원이 필요합니다

등록 2006.07.22 08:40수정 2006.07.22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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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형.
전 지금 인천공항 출국장 앞에 앉아 이 편지를 씁니다. 한국을 떠나는 데 절차가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 몇 시간 일찍 공항에 나왔는데 수화물 부치고, 출국 신고를 마칠 때까지 30분이 채 안 걸리더군요. 가지 말라고 누군가 잡아주기를 바랐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삼십 몇 년을 더 살아온 한국을 이렇게 쉽게 떠나게 되니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네요.


공항에 가족단위의 여행객들이 많습니다. 옆 자리의 한 가족은 아이들 방학을 맞아 영어캠프에 참가하기 위해 출국한다며 저 더러 같은 경우냐고 묻습니다. 직장 때문에 이민 가는 거라고 하니까 '축하한다'고 하더군요.

한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가족 사진을 찍었습니다.
한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가족 사진을 찍었습니다.이봉렬
이번뿐만 아니라 그 전에도 제가 싱가포르에 간다고 하니까 많은 분들이 '축하한다'는 인사를 했습니다. '엄마와 아이들만 유학 보내는 기러기 가족도 있는데 온 가족이 함께 갈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며 잘 된 일이라고 하더군요. 제 나라를 떠나서 외국에 가서 사는 걸 축하 받는 시절을 살고 있습니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 우리 말 구사 능력,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사고 등은 원어민으로부터 교육받을 수 있다는 장점 앞에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합니다.

사실 저 역시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싱가포르에 가면 아이들 영어 하나만큼은 해결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교육부총리의 자녀가 외고를 다니는 것이 인사청문회의 핵심이 되고, 아이들 영어 실력이 곧 계급이 되는 현실에서 영어 교육을 위한 사교육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서민으로서는 이민이 하나의 돌파구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민으로 인해 아이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지 못하고, 우리 역사를 알려주지 못하는 게 더 안타깝게 여겨지는 게 정상일 텐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축하한다'는 인사말이 참 씁쓸했습니다.

아이들 교육 문제가 영향을 주긴 했지만 그보다도 10년째 한 회사에서 붙박이처럼 직장생활을 하던 제가 한국을 떠날 생각을 한 건, 제 사고를 통제받지 않고 싶어서였습니다. 한국의 대기업에 소속을 둔 채로 저 자신을 노동자로 규정하고, 자유경제체제의 비인간적인 측면에 주목하는 글을 쓴다는 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당연히 지난 6년여 간의 글쓰기가 회사와의 불화를 불러 왔습니다. 때문에 업무 외의 영역에 대해 간섭하지 않는 (혹은 그렇게 믿고 있는) 외국회사로 눈을 돌리게 되었지요.

다행히 제가 가는 싱가포르에는 먼저 터를 잡고 생활하는 벗들이 몇 있어서 이번에 직장을 옮기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물론 그곳에서도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겁니다. 낯선 곳에 대한 적응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며,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겪을 시행착오도 많겠지요. 무엇보다도 저 하나를 믿고 한국을 함께 떠나는 가족들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라도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겁니다.

그렇다고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겠다는 건 아닙니다. 그럴 거라면 애초부터 회사를 옮기거나 한국을 떠나지 않았을 테지요. 관성에 의해 끌려가듯 살아온 저의 삶을 반성하고, 새로운 경험을 통해 저 자신을 긴장시키는 계기를 만들겠습니다. 시야를 넓혀서 또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저 자신을 잃지 않고 살 수 있도록 부단히 스스로를 돌아보겠습니다.


이러한 다짐을 굳이 박 형에게 털어놓는 것은 지금 제 스스로가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는 새로운 삶의 현장에서 제가 마음 하나 지키며 살 수 있을지 모르겠기 때문입니다. 어려울 때마다, 흔들릴 때마다 오늘 박 형에게 한 다짐들을 떠올리며 자세를 다 잡기 위해서입니다. 편지를 쓸 때마다 박 형이 위로해 주고, 용기 북돋워 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박 형.
이제 가야겠습니다. 비행기가 뜨고, 몇 시간 후면 전 싱가포르에 도착해 있을 겁니다. 이 편지가 한국에서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편지를 박 형이 읽게 될 때쯤이면 전 새로운 삶 한가운데 들어가 있겠지요. 박 형의 응원이 필요합니다. 제가 박 형을 잊지 않듯이 박 형 역시 저를 잊지 않기 바랍니다. 또 편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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