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 소화 안 될 땐 나물 넣고 팍팍 비비세요!

입맛 살리기 위한 아내의 특별 메뉴, 꽁보리비빔밥

등록 2006.07.23 19:47수정 2006.07.23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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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토), 방바닥에 배를 붙이고 아들을 위해 도서관에서 빌려온 <수호지>를 읽고 있는데 아내가 "시장에 같이 가자"고 야단입니다. 내키지는 않지만 장마철이라 운동을 하지 않아 몸이 찌뿌드드하고 속도 답답해서 군말없이 아내를 뒤따릅니다.


a 꽁보리밥에 각종 나물과 장을 얹었다. 이젠 쓱쓱 비비면!

꽁보리밥에 각종 나물과 장을 얹었다. 이젠 쓱쓱 비비면! ⓒ 한성수

도시에 서는 5일장(창원에는 2일과 7일에 소답장이, 4일과 9일에 상남장이 열립니다. 생선의 경우, 아내는 동네 재래시장이나 할인매장의 절반값이라고 귀띔해 줍니다)은 규모가 더 크고 전문적인 장사치들이 장마당을 열어, 옛날의 시골장터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지만 시끌벅적함과 흥겨움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모퉁이를 돌아서는데, 팔순의 할머니가 쪼그리고 앉아 보리쌀과 조, 콩, 흑미(검은 쌀)를 팔고 있습니다. 나는 그냥 지나치려는 아내의 손을 잡아당깁니다.

"장마철이라 속이 더부룩한 것이 소화도 되지 않는 것 같은데, 오늘 저녁은 보리밥이나 해 먹읍시다."

아내는 보리쌀 한 되를 4000원에 삽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냉대받던 보리쌀이 지금은 오히려 쌀값보다 비싼 것 같습니다. 푸성귀를 가지고 시골에서 오신 할머니들은 시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길모퉁이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할머니들에게서 몇 가지의 나물류를 샀습니다.

a 꽁보리밥(예전에는 거무끄름했는데, 지금은 쌀밥처럼 하얗다)

꽁보리밥(예전에는 거무끄름했는데, 지금은 쌀밥처럼 하얗다) ⓒ 한성수

집에 들어서자마자 아내는 보리쌀을 씻어서 물에 불립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 꽁보리밥(순수한 보리쌀만으로 지은 밥)을 할 때면 보리쌀을 곱삶아야 했습니다. 아침밥을 하고 남은 삶은 보리쌀을 대소쿠리에 담아서 시렁에 얹어놓았는데, 도시락을 싸갈 수 없어 점심밥을 굶은 나는 그 삶은 보리쌀을 한 움큼 가득 쥐고 씹어 먹었습니다. 그러나 보리쌀은 아무 맛도 없는데다가 까끌거리며 입안에서 겉돌아 그저 주린 배를 채우는데 만족해야 했습니다.

지금은 보리밥을 할 때 곱삶을 필요가 없습니다. 방앗간에서 보리쌀을 워낙 많이 깎기도 했거니와 압력밥솥에 앉히면 그만입니다. 거뭇거뭇한 테를 두른 고슬고슬한 보리밥이 보시기에 담겼습니다.


몇 해 전, 지금은 돌아가신 작은 아버지가 부산에 있는 누나 집을 다녀가셨습니다. 누나는 작은 아버지를 자갈치 시장 근처 보리밥집으로 모셨습니다. 작은 아버지는 비빔밥을 몇 술 뜨시다가 숟가락을 놓았습니다.

"작은 아버지! 옛날에 드신 음식이라 좋아하실 줄 알고 모시고 왔는데…."
"나는 괜찮다마는 너희도 옛날에 보리밥을 그렇게 지겹게 먹었는데, 지금도 보리밥이 먹고 싶으냐? 나는 하얀 이밥(쌀밥)이 목구멍에도 잘 넘어가고 맛도 더 좋다."

작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누나는 무척 무안했다고 했습니다. 누나의 보리밥은 추억일 수 있지만 작은 아버지는 그리 생각할 수 없었나 봅니다.

a 각종 나물(숙주, 고추잎, 가지, 고구마줄기, 비름나물과 열무김치, 무우채나물)

각종 나물(숙주, 고추잎, 가지, 고구마줄기, 비름나물과 열무김치, 무우채나물) ⓒ 한성수

아내는 비빔밥에 들어갈 각종 나물을 무쳐냅니다. 초록색이 나는 비름나물과 고춧잎 무침, 하얀 색의 숙주나물, 연녹색의 가지나물과 고구마줄기 무침, 붉은 색깔을 내기 위해 무채를 고추장에 조물조물 무쳤습니다. 또한 시원한 맛을 내기위해 열무물김치를 담아 놓았습니다.

보리비빔밥 집에 가면 더러 계란프라이를 얹어 내기도 하는데, 옛날에 먹던 보리비빔밥이 계란프라이를 얹어 먹을 정도로 호사스런 음식이었나요? 나물을 무칠 때도 될 수 있으면 나물 특유의 맛이 살아있도록 진한 양념은 쓰지 않는 것이 좋아요. 계란프라이를 얹으면 그 짙은 냄새가 비빔밥 고유한 냄새와 색깔을 덮는 것 같아, 나는 될 수 있으면 피합니다.

a 고추장과 진하게 끓인 된장.

고추장과 진하게 끓인 된장. ⓒ 한성수

아내는 고추장과 호박, 양파, 두부 등을 넣어 뻑뻑하게 끓인 된장을 옆에 얹었습니다. 나는 나물과 고추장을 넣고 쓱-쓱 비빕니다. 빨간 바탕에 하얗고 파란 나물로 장식된 맛깔스런 꽁보리비빔밥이 마침내 완성되었습니다.

나는 한 입 가득 비빔밥을 입에다 넣습니다. 고추장을 넣어서인지 알싸한 고향의 맛이 입안을 그득하게 채우더니, 추억의 향을 뿌리며 목구멍 안으로 사라집니다. 아내와 아이들의 비빔밥 보시기도 금세 바닥이 드러납니다.

저녁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는데 여기 저기 '붕~붕', '삐이익' 소리가 요란합니다. 아들은 의심의 눈길을 담아 내 옆에서 코를 '킁-킁' 거립니다. 나는 슬며시 아내 쪽으로 고개를 돌립니다. 짐짓 아내는 샐쭉해진 것처럼 소리칩니다.

"그래, 집에서 방귀 뀌는 것도 너희들 허락을 맡아야 하니? 그리고 내 방귀는 소리만 컸지 냄새는 나지 않거든!"

아이들은 까르르 웃으며 넘어지고, 나는 스스로 무안해서 고개를 숙입니다. 그런데 저 멀리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련히 들리는 것 같습니다.

"수야! 밥을 묵고(먹고) 나서 그렇게 나부되모(뛰어다니면) 배가 퍼뜩 꺼징게네(꺼지니까) 지발(제발) 가만히 좀 있어라. 꽁보리밥은 험석(거친 음식)이라 끈기가 없어서 묵고 나모(먹고 나면) 배에는 금방 표가 없어지고 방구소리(방귀소리)만 요란하다카이!"

꽁보리밥이 건강식이라고 사람들이 즐겨찾을 줄, 어머니나 저나 어찌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장마철이라 운동을 하지 않아 속이 더부룩한 것이 소화가 되지 않는다구요? 꽁보리밥을 강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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