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사랑을 깨우쳐준 연극 <벽 속의 요정>

김성녀의 열연과 남편 손진책의 헌신적 외조... 사랑을 왜 잊고 살았을까

등록 2006.07.24 15:29수정 2006.07.25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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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속의 요정
벽속의 요정김성녀홈페이지
해방 이후 이념의 희생양이 되어 40년간을 벽 속에 숨어 지내야 했던 남자. 해금 소식을 듣고 아내와 사위의 부축을 받으며 40년 만에 땅을 밟은 남편의 심정은 무엇이었을까? 지난 세월 그 어렵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뒤로하고 이제는 요정이 아닌 사람이 된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는 감격의 눈물을 쏟는다. 그리고 노래한다. ‘살아 있다는 건 아름다워요’


“사위와 내가 부축해서 아주 불안하고도 어설프게 걸었어요. 사십 년만에 말이에요. 그 양반에게는 낯설기만 한 이 나라를 만나기 위해서요.

이 넓은 세상에 우리 함께 걸어요.
이젠 고통도 끝이 났어요.
살아 있다는 건 아름다워요.
햇빛 가득 한 거리 가슴 활짝 열고서
지난 아픔은 모두 다 잊고 활짝 웃어 보아요.
희망을 버리지 않기를 정말 잘 한 것 같죠.

내 눈물이 당신의 뺨을 적시고 있어요.
용기 내 지내왔던 날들
살아있다는 건 아름다워요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
이렇게 아름다운 날들
내 눈물이 당신의 뺨을 적시고 있어요.
용기 내 지내왔던 날들
살아 있다는 건 아름다워요. 살아 있다는 건 아름다워요.“


김성녀의 모노드라마 <벽 속의 요정>은 일본작가 후쿠다 요시유키가 스페인 내전 때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쓴 작품으로 배삼식씨가 번안했다. 1인 30역을 신들린 듯 해내는 배우 김성녀. 그녀의 접신(接神)에 이른 연기를 보는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은 입장 전 극장 앞에서 관객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던 그녀의 남편이며 연출자인 손진책의 모습이었다. 어쩌면 그녀의 남편 역시 <벽 속의 요정>처럼 끊임없이 그녀에게 관심을 갖고 그녀를 사랑하며 남모르게 그녀의 일을 도와주는 최고의 외조자이기 때문이다.

<벽 속의 요정>의 연출자이자 김성녀씨의 남편인 손진책씨.
<벽 속의 요정>의 연출자이자 김성녀씨의 남편인 손진책씨.김혜원
이념의 대립과 갈등 속에 자신의 집 벽 속으로 숨어들어 지낼 수밖에 없던 남편. 남편을 대신해 억척스럽게 딸아이를 키워 가는 아내. 불행해 보이거나 암울해 보일 수 있는 모녀의 이야기는 두 모녀와 관객들만이 알고 있는 벽 속 요정 때문에 슬픈 가운데서도 행복하고 아픈 가운데도 따뜻하다. 그래서 관객은 울다, 웃다, 또 울다, 웃다를 반복한다.

아무리 지독한 불행이 닥쳐도 가족 간의 사랑과 신뢰가 살아있는 한 불행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연극 <벽 속의 요정>에서 두 시간 남짓 연기를 펼치는 배우 김성녀는 혼신을 다하는 노래와 몸짓과 말소리와 눈물로 짙은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사랑. 흔해빠진 유행가 가사와 같은 사랑을 입에 달고 사는 우리는 정말 사랑하는 것일까? 결혼 20년을 맞아 사랑이란 말조차 어색해져 버린 우리 부부는 과연 행복한 것일까?

“생활비 좀 올려주지.”
“요즘엔 왜 이렇게 일찍 들어와? 바깥에서 친구도 만나고 그럼 좋잖아. 날도 더운데 저녁 차리기 귀찮아 죽겠어.”
“그 텔레비전 좀 가만 두면 안 되나? 내가 각 방을 쓰던지 해야지. 당신 때문에 못살아.”
“어디 출장 좀 안가?”


김성녀. 손진책 부부
김성녀. 손진책 부부김성녀홈페이지
더 많은 세월을 함께 하면서도 늘 사랑하는 부부들도 있겠지만 한 20년을 살아보니 부부라는 존재가 그저 그렇다. 때로는 ‘등 돌리면 남’이라는 소리를 해가며 일부러 남편의 속을 후벼보기도 한다.

<벽 속의 요정>을 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한때는 나도 남편이 그 자리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시간들이 있었다는 것을…. 그의 목소리만 들어도, 그의 숨결을 느끼기만 해도, 그의 그림자만 보아도 살 수 있을 것 같던 그런 날들이 까마득한 시간 저 너머에 분명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할머니 품에서 들었던 잊혀진 옛날이야기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잊고 살았기에 사랑을 이야기하는 그녀의 노래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사랑이란 무엇을 주는 것도 무엇을 받는 것도 아닌 그저 살아만 있어주어도, 내 곁에만 있어주어도 아름다운 것이라는 걸 왜 잊고 살았을까?

“아빠 거기 있어요? 아빠? 잠든 막내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이 아이한테도 요정이 있다는 걸 알려줘도 좋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저는 잠든 아이의 등을 두드리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옛날 엄마가 저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넘쳐 넘쳐흐르는 볼가강물 위로
스텐카라친 배 위에서 노래 소리 들린다.”


연극의 피날레는 장중하게 울리는 러시아 민요 '스텐카라친의 노래'로 끝이 난다. 여기 저기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 흘리는 관객들. 이윽고 무대에 불이 밝혀지고 두 뺨이 눈물로 젖은 김성녀가 나타나자 관객들은 극장 안이 떠내려갈 듯한 기립 박수로 그녀의 열연에 화답한다. 그녀도 울고 객석도 울었다. 얼마 만에 흘려보는 눈물일까?

눈물을 닦고 극장을 나서니 우리에게 큰 감동을 안겨준 배우 김성녀의 <벽 속의 요정>인 그녀의 남편 손진책이 관객들과 예의 그 환한 웃음을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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