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가 멈춘다고 세월이 멈추는 건 아니다

[달팽이가 만난 우리꽃 이야기 46] 시계꽃

등록 2006.07.26 18:33수정 2006.07.26 19:10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 김민수

꽃 중에서는 사물이나 동물 혹은 곤충들을 닮은 꽃들이 많다. 그래서 꽃이름 중에 동물이름이 들어간 꽃들도 많고, 사물의 이름이 들어간 꽃들도 많다. 그리고 사연이 깃들어있는 꽃들도 많다.

골무꽃은 골무의 모양을 닮아서 골무꽃이고,
붓꽃은 꽃몽우리가 붓을 닮아 붓꽃이다.
꿩의다리는 꿩의다리를 닮아 꿩의다리고,
제비동자는 제비의 꼬리를 닮아 제비동자꽃이다.
나팔꽃은 나팔을 닮아 나팔꽃이고,
담배풀꽃은 곰방대를 닮아서 담배풀꽃이다.
며느리밑씻개는 며느리의 아픈 사연이 들어있는 꽃이고,
사위질빵은 장모님의 사위사랑이 들어있는 꽃이다.
시계꽃은 시계를 닮아서 시계꽃이고,
노루발풀는 노루발을 닮아서 노루발이다.
쥐오줌풀은 쥐오줌 냄새가 나서 쥐오줌풀이고,
쥐똥나무는 열매가 쥐똥을 닮아 쥐똥나무다.
우산나물은 우산을 닮아서 우산나물이고,
타래난초는 타래를 닮아서 타래난초다. - 자작시 <꽃의 이름>


a

ⓒ 김민수

시계꽃은 야생화가 아닌 원예종이다. 꽃모양이 영락없이 시계 모양을 닮았다. 꽃술까지 시계의 시침과 분침을 보는 듯한 형상을 간직하고 있으니 이름을 알려주지 않고 이름을 붙이라고 해도 시계꽃으로 이름이 지어질 확률이 상당히 높은 꽃이다.

원예종 중에서 병솔꽃도 그렇다. 아이들 우유병을 세척할 때 사용하는 병솔의 모양을 하고 피어나 보는 이마다 "저거 병솔 닮았네!"할 정도이니 다른 이름을 붙여주어도 '병솔꽃'이라고 이름을 바꿔주자고 할지도 모를 그런 꽃이다.

야생화 중에서는 개망초가 그렇다. 계란후라이꽃이라고 하면 딱 좋을 꽃, 그래서 개망초라는 이름은 잊어도 '계란후라이꽃'이라고 하면 '아, 그 꽃!'할 수 있는 그런 꽃이다.

시계꽃을 처음 보았을 때에는 너무 신기했다. 어쩌면 이렇게 시계를 꼭 빼어 닮았을까 신기했고, 덩굴식물이라 얼키설키 담장을 타고 올라가 피어난 모습이 영락없이 벽에 걸린 시계의 모양이었다. 사람들만 시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곤충이나 동물도 시계가 필요할지 모르겠다는 상상을 하며 그 꽃의 신비한 모습을 마음에 담아두었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고, 경기도에 있는 화원에서 조우를 했다. 아주 오랜 시간 흘렀지만 시계꽃은 그냥 시계꽃 그 모습 그대로 피어있다. 마치 멈추어진 시간을 보는 듯했다.

a

ⓒ 김민수

도시에서 생활을 하면서 몇 년간 벗어두었던 시계를 다시 차고 다닌다. 시계를 다시 찬다는 것은 시간에 그만큼 쫓기면서 산다는 이야기겠다. 시골에 살 때에는 자연의 흐름 속에서 시간을 읽는 것이 익숙했는데 서울살이를 하다보니 시간의 흐름이 잘 들어오질 않는다. 밤에도 형형색색의 네온사인과 인공의 빛들이 넘쳐나니 자연의 시간을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다. 누구도 세월을 저축했다 쓸 수 없고, 현재라는 이 순간도 지나고 나면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시간으로 흘러간다.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있을 때 늘 그 물이 그 물인 듯하지만 이미 저 낮은 곳으로 흘러가버린 물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세월은 물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인간의 편의를 위해서 만든 시간의 개념이 사람들의 삶을 제약하기 시작했다. 느끼는 시간보다 시각으로 보면서 "시간은 금이다"라는 말을 더 실감했을지도 모르겠다. 열심히 일하다가도 시간을 보면서 배고프다 느끼고, 잠잘 시간이라고 느끼면서 온 몸이 나른해 지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주인이 아닌 시간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은 아닌지.

a

ⓒ 김민수

손목시계를 차고 다니지 않을 때의 일이다. 운전을 할 때는 습관적으로 차에 부착된 디지털시계를 본다. 집에서 시계를 보고 약속시간을 맞춰 나왔는데 한참 운전을 하면서 가다보니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 대략 30여분의 여유가 있는 듯해서 길가에 차를 세우고 한라산자락으로 들어가 야생화를 만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리고 모 방송사에서 생방송 시간이 거의 다 되어 가는데 어디쯤이냐고 닦달한다. 그제야 전날 자동차 배터리를 교체한 후에 시계를 맞춰두지 않았음을 알았다. 허겁지겁 도착해서 숨을 고르지도 못하고 생방송을 하는데 얼마나 땀이 많이 나던지 방송이 끝나고 나서야 깊은 한숨을 쉬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옛날 어머니들은 시계가 없을 때에는 꽃의 피고 지는 모습을 보면서 시간을 가늠했다고 한다. 비비추를 화단에 심어놓고 비비추꽃망울이 활짝 피면 저녁을 지을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러니 나팔꽃이 돌돌 말릴 즈음이면 점심시간이 되었음을 알았을 것이고, 활짝 피었던 나팔꽃이 시들기 시작하면 새참을 내가야 할 때인 줄 알았을 것이다. 달맞이꽃이 활짝 피면 자정에 가깝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달맞이꽃이 살포시 꽃잎을 닫으면 곧 해가 뜬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들판에 피고 지는 들풀들을 보면서 계절의 흐름도 알았을 것이고, 그 해 농사의 풍년을 점치기도 했을 것이다.

a

ⓒ 김민수

시계가 멈춘다고 세월이 멈추는 것은 아니다. 아니, 시계가 있다고 세월이 더 빨리 가는 것도 아니고 천천히 가는 것도 아니다.

시계꽃은 피었다 시듦으로 계절의 때를 알려준다. 싹을 틔우고, 꽃몽우리를 맺고, 활짝 피었다가 지는 순간 모두를 통해서 계절의 시간을 알려준다. 그 시간을 걸어가는 걸음의 속도는 자기의 본능에 충실한 속도이다. 그저 자기대로 피었다 지는데 그를 바라보는 이들은 그를 통해서 세월의 흐름을 보는 것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연봉 천만원 올려도 일할 사람이 없어요", 산단의 그림자
  2. 2 은퇴 후 돈 걱정 없는 사람, 고작 이 정도입니다
  3. 3 구강성교 처벌하던 나라의 대반전
  4. 4 왜 여자가 '집게 손'만 하면 잘리고 사과해야 할까
  5. 5 [단독] "문재인 전 대통령과 엮으려는 시도 있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