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 속에서 아내에게 마술을 부리다

누군가의 우산이 되어주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등록 2006.07.28 18:44수정 2006.07.29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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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이면 많아야 한두 번을 빼놓고는 마치 시계추처럼 정확하게 직장과 집 사이를 오가는 뻔한 일상들이 가끔은 싫증이 날 때도 있습니다. 그런 마음이 도랑을 넘치는 물처럼 철렁거릴 즈음이면 아내가 친정이라도 다녀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슬며시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입니다. 아내가 없으면 혼자서 어딘가 끝없이 걷다가 오고 싶고, 시간이 없어서 덮어두었던 장편소설을 밤새 읽고도 싶고, 아니면 어디 쓸쓸한 주막에라도 가서 아내가 싫어하는 술도 한 잔 하면서 좀 고독(?)한 시간을 보내고도 싶은데 막상 그럴 수 있는 시간이 오면 애국가가 울려 퍼질 때까지 멍청하게 텔레비전이나 보고 있기 일쑤입니다.

물론 하루 정도는 오랜만에 맛보는 자유를 만끽하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틀이 채 지나지 않아 저는 아내가 없는 공간에서 거의 식물인간이 되고 맙니다. 그러다보면 좀스럽게 처가에 전화를 걸어 언제 오는지 자꾸만 확인을 해보는 것인데, 그때마다 제 속내를 여우처럼 훤히 알고 있는 아내는 아주 퉁명스런 목소리로 이렇게 말을 해댑니다.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다면서. 아내의 남편이 아닌 당신 혼자만의 시간을 한 번 가져보시지 그래."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면 늘 아내가 집에 있습니다. 아내가 없는 날은 한 달에 한두 번도 아니고 일년이면 서너 번이 될까 말까합니다. 그렇게 늘 있어야 할 곳에 있어온 아내여서 그런지 무슨 일로 잠깐 집을 비운 날은, 좀 과장을 섞어 말하자면, 잘 돌아가던 지구가 잠깐 멈추어 서버린 듯한 그런 짧지만 아득한 순간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나이를 먹어가는 징조이겠지만, 누군가에게 길들여진다는 것이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제는 특별히 아내를 찾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며칠 동안 머리 속에만 맴돌던 한 편의 시가 글로 나와 주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언제부턴가 시가 완성되면 제일 먼저 아내에게 보여주곤 했습니다. 그것은 생일선물로 장미꽃을 선물해주는 그런 행위와는 사뭇 다릅니다. 아내에게 시를 보여주는 것은 제 시의 첫 번째 독자가 되어달라는 낭만적인 의미보다는 오히려 냉정한 평자가 되어달라는 부탁의 의미가 더 큽니다.

제 시의 평자로 굳이 아내를 선택한 것은 아내가 시를 보는 안목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이유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아내가 시를 전혀 모른다는 말은 아닙니다. 전문가적인 입장에서 시를 보는 사람은 못된다는 말이지요. 아내가 시를 읽다가 고개를 끄덕이거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면 저는 일단 안심을 합니다. 시에 통달한 전문적인 평론가만 좋아할 수 있는 그런 난해한 시는 대중에게 다가가기 어렵기 때문이지요. 다음은 제가 어제 아내에게 보여준 시입니다


아내와 방천길을 걷다가 비를 만났다.
장마철이라 들고 나간 우산을 얼른 펴들자
아내는 나더러 선견지명이 있다고 했다.
그 말에 응수라도 하듯 빗발은 더욱 굵어지고
나는 아내를 우산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아내의 오른쪽 팔소매가 젖어 있었다.
내 왼쪽 어깨가 젖어 있는 것도 알았다.
그렇게 한쪽을 조금씩 내어주며
우린 장대비 속에서도 무사했다.


집에 돌아와 우산을 접다보니
가장 많이 젖은 것은 우산이었다.
그거야 우산이니까 당연한 일이지만
그래도 애썼다는 생각에
마음 한쪽이 우산처럼 접어졌다.

-자작시, '우산'


다행히도 시를 읽는 동안 몇 번인가 아내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고 눈가에 잔주름도 만들어졌습니다. 어느 대목에서 그런 감정의 파동들이 일어났는지 궁금해서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아내의 입에서 어떤 대답이 나올지 뻔히 알고 있었지만 말입니다.

"시 어때?"
"몰라. 내가 시를 어떻게 알아?"

a 아내와 산책길에 만난 작은 풍경

아내와 산책길에 만난 작은 풍경 ⓒ 안준철

오랜만에 시가 찾아온 그날, 아내와 저는 저녁을 일찍 먹고 방천길로 나가 산책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원해서 나온 산책길이었지만 저는 몸이 많이 피곤해 있었습니다. 지리산 산행을 앞두고 몸을 만들 생각으로 사뭇 빠른 걸음으로 가까운 산을 다녀왔기 때문입니다. 며칠 째 계속된 준비산행으로 인해 아내와 저녁 산책을 못하게 된 것이 미안해서 그날은 좀 무리를 했던 것이지요. 아내는 며칠 산책을 못하다가 저녁에 운동을 하러 나온 것이 좋았던지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보, 나 지금 너무 행복한데 딱 한 가지 소원이 있어."
"뭔데?"
"다른 것은 다 그대로 있고 당신과 나, 십 년만 젊어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내의 소원대로 십 년이 젊어진다면 아내는 마흔 둘, 저는 마흔 셋이 됩니다. 저는 아내의 소원을 욕심으로만 생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실 그동안 아내는 철없는 남편의 우산이 되어주느라 행복할 겨를이 없었던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제는 제가 아내의 우산이 되어줄 차례인데 아내나 저나 어느 새 노후를 생각할 나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언젠가 '내 나이가 마흔이라니…'로 시작되는 시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시인은 아내가 돌아가고 싶은 기적 속의 나이를 살고 있지만 자신의 황금 같은 시절을 감사하며 행복해하기는커녕 한탄만하고 있는 것이지요. 가만 생각해보니 저도 지금은 꿈에라도 돌아가고 싶은 사십대를 그런 불평과 푸념 속에서 살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비에 젖지 않기 위해 제게 바짝 다가선 아내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보, 당신 사십대 때는 당신이 젊다고 생각했어? 아니지? 그땐 삼십대가 그리웠겠지?"
"맞아. 그때는 마흔 살이 된 것이 징그러웠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우린 지금 실제 나이가 육십대야. 그런데 하나님이 특별히 당신의 소원을 들어주어서 오십대가 된 거라고 생각해. 당신이 그랬잖아. 다른 것은 다 그대로 있고 당신하고 나하고 십 년만 더 젊어졌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우리가 오십대가 된 거라니까. 이 기적의 나이를 정말 감사하면서 행복하게 살아보자고."

a 동천 길가에 핀 달개비(닭의장풀이라고도 함)

동천 길가에 핀 달개비(닭의장풀이라고도 함) ⓒ 안준철

사람의 생각과 말이란 참 신기합니다. 아내는 마치 제가 무슨 마술이라도 부린 듯 금세 달라진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우산 속에서 말입니다. 우산 속에서…. 만약 그때 우산이 없었다면, 우산이 장대비로부터 아내와 저를 막아주지 않았다면 그런 행복한 순간들이 있기나 했을까요?

제가 사는 남쪽 지방은 비가 그쳤지만, 또 며칠째 폭우가 쏟아지면서 전국에 비 피해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행복했던 보금자리를 잃고 기본적인 의식주마저 해결하지 못하고 계시는 그분들을 생각하면 이런 글을 쓰는 것조차 죄스럽습니다. 그분들에게 우산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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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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