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원제는 <겨레의 어미강을 찾아서> 였다 | | | [대담] <가야공주, 일본에 가다> 펴낸 이영아 | | | |
| | | ▲ 8월 1일 대담을 하는 이영아씨 | ⓒ김영조 | - 어떻게 이 책을 펴내게 되었나?
"올케로부터 아버지의 유고가 있다는 걸 알고 달라고 했다. 하지만, 보따리에 싸인 원고는 천여 장, 사진 80여 장이 있었고, 일부는 빠지고 섞여 있기도 했다. 그런 상태에서 이 원고를 정리하기는 정말 어려웠다. 20여 년 "내 손이 내 딸이다"라고 하시던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고, 어떻게든 아버지의 원고를 완성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싸여 있었다.
그렇게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을 때 전에 같은 직장에 있던 동료가 와서 "책을 내지 마라. 아니면 아버지의 생각을 전달하는 심부름꾼이란 생각을 하지 말고, 지은이가 되어서 생각하라"라고 충고해 주었다. 난 깜짝 놀랐다. 정말 내가 독자를 배척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 뒤 나는 아버지의 딸이 아닌 후배이며, 제자 아니 이 책의 저자라는 생각으로 임했고 완성할 수 있었다."
- 이 책에 대한 의의를 생각한다면.
"한반도는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는 생각을 아무도 하지 않는다. 바다는 분명 거기에 있는 것이고, 그를 통한 해양대국 가야는 있었다. 이런 유산을 우리는 물동이 릴레이로 전해 받았고, 누리고, 또 그것을 후세에게 전해줄 권리와 의무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문화이고, 힘이고, 근원이다. 이것이 흔들리면 가난한 백성에겐 한의 대물림을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 아버지께서 가야사를 찾는 일에 매달린 실마리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문학을 하셨던 아버지는 우리도 고대 그리스의 ‘일리야드’ 같은 민족대서사시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역사를 섭렵하셨다. 그러다가 삼국유사의 일연스님에게서 ‘가야의 공주 한 명, 왕자 한 명은 어디 갔어?’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수로왕과 허황후 사이엔 열 아들과 두 명의 딸이 있었다. 이중 일곱 명의 아들은 불도를 닦았고, 한 명은 거등왕이, 또 한명은 거칠군이 됐다. 그리고 한 명의 딸은 석탈해(昔脫解·탈해왕) 맏아들의 비가 되었다고 쓰였다. ‘그러면 남은 공주 한 명과 왕자 한 명은 어디로 갔을까?’라는 의문을 가졌고, 여기에서 해상대국 가야를 찾아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 일을 아버지는 연어가 어미강을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책의 원제는 ‘겨레의 어미강을 찾아서’였다."
그런데 아버지가 이 어미강을 찾아가는 과정은 곳곳에 둑이 쌓여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었다고 이영아씨는 회고한다. 그녀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던 어머니에게 한마디만 해달라고 채근하자 어머니는 일본에서는 어디 가나 "당신이었군요" 라는 말을 들었지만 정작 자신의 나라에선 그렇게 말해줄 사람이 없었다는 말을 했다며 기어이 눈물을 비췄다.
- 그런데 왜 굳이 가야사인가?
"아버지는 학교에서 역사를 배울 때 치욕의 역사가 중심인 근대사에 60% 이상의 비중을 두는 것을 못마땅해하셨다. 딸이 만일 윤간을 당했다면 이웃에게 뭐라고 할 것인가? ‘불쌍한 것’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참 예쁜 딸’이라는 표현을 하는 것이 진정 딸을 사랑하는 부모의 도리가 아닐까?
역사는 미래와 연결된 것이기에 불행한 역사보다는 당당했던 역사를 조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특히 잃어버린 역사는 더욱 당당한 것들이다. 물론 잃어버린 역사 중에는 단군조선이나 고구려도 있다. 하지만, 단군이나 고구려 역사는 70년대 당시로는 현장에 갈 수 없는 한계 때문에 탐구할 수도 없었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가야사를 찾으면 다른 역사도 자연 회복될 것으로 생각하셨을 게다."
그녀는 처음 이 책의 원고를 정리할 땐 가야사를 봤지만 다 끝내고 난 지금은 가야사만이 아닌 민족사가 보였다고 했다. 그리고 이 책이 가야사의 완성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며, 분명 채우지 못한 부분이 있는데 이는 독자들과 같이 메워나가길 바란다는 말로 이야기를 맺었다.
나는 대담을 마치고도 약간은 미련이 남았다. 그 강대했던 해상대국이 왜 무너졌을까? 그에 대해 책의 끝 부분에 <두 가지 질문을 생각하다>를 쓴 저자의 차녀이며, 환경과 생명문제 관련 저술가인 이진아씨에게 그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그는 집필을 하기 위해 경주에 내려가 있어서 전화로 할 수밖에 없었다.
"김해 구지봉에 올라가 보면 김해는 한 나라의 서울로는 좁은 땅이고, 삼태기 지형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인구가 늘게 되면 오염이 심각해지고, 생산성이 떨어지며, 사회질서가 흔들릴 수 있다. 먼저 그런 까닭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가야가 번성했을 시절 낙동강은 큰배가 육지 깊숙이 들어올 수 있을 만큼 커서 해운이 발전했고, 그에 따라 해양대국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점차 강 상류의 울창한 숲이 마구잡이로 베어 없어지면서 배를 만들 수 있는 조건이 사라졌을 것이고, 이에 따른 환경변화로 점차 기력은 쇠약해졌으리라 짐작된다. 이와 비슷한 또 다른 예는 남태평양 이스터섬이 될 것이다." / 김영조 | | | | |